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와 너를 바라보는 일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 156p
주인공 연두에게도 불행한 시절이 있었구나. 그 본격적인 이야기가 이제부터 시작될 것만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 해진다. 어떤 불행과 어떤 서사가 얽혀 어떤 이야기로 흘러갈 것인가. 소설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아픔을 다룰 수밖에 없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 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 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리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 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158p
수난에 대한 수사가 인상에 남는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사라지기만을 끙끙대며 버틸 수밖에 없는 상황.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찾게 되는 것이 기도라는 설명에 그 간절함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연두는 어떤 수난을 견뎌온 것일까. 대온실을 수리하며 연두는 과거의 어떤 수난을 녹이고 있었던 것일까.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하고 견뎌낼 수밖에 없는 시절을 보냈던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억울함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연두가 어린 시절 겪었던 억울한 사건, 시대의 풍파 속에서 개인적 고통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주인공 안문자 할머니의 억울함. 두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가 포개어지며 각자의 억울함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먹먹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와 마주할 용기를 내는 것이 대견하다. 과거에 묻힌 타인의 억울함을 해결하며 자신의 억울함과 마주하고, 그 두 억울함이 조금씩 해갈되어 가는 과정은 무던한 듯하면서 동시에 시큰한 울림을 준다.
방대한 자료조사를 통해 여러 이야기를 층층이 포개어 결국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해내는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며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붙잡고 살 것인가, 얼룩진 나의 과거와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용감하게 직면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