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

언젠가 소설이 될 이야기

by 정 호

본 내용은 픽션입니다.



"책 읽고 글 쓰더니 너는 이제 반쯤 철학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철학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 사이에 큰 괴리가 있다는 걸 나 스스로도 이제는 완전히 느껴. 나는 이제 가만히 움직이는 갈대를 바라보면서도 아름다움을 느껴, 그건 마치 다빈치나 에곤 쉴레의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의 진폭 동일한 감정이야. 저 자리에서 억겁의 시간을 살아왔을 자연물의 존재, 그 존재 자체에 경외감을 느껴. 그리고 그건 때때로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켜, 시간에 관한 어떤 생각들, 소멸과 영생, 유한과 무한, 존재와 허구 같은 개념들, 혹은 우연과 인연에 관한 생각들, 이런 것들은 저 갈대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관여하기도 하는 것이기에 갈대를 보며 동시에 인간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어.


자연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손을 거친 인공물을 통해서도 똑같은 아름다움을 느껴. 지어진 지 오십 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주택과 그 옆에 우뚝 솟아있는 최신식 대형 카페를 바라보며 여러 감정을 느껴, 그리고 그 감정들을 하나씩 골라내서 들여다보곤 해. 그 과정은 앞서 갈대를 바라보며 진행했던 것과 비슷해. 얼마나 많은 우연과 인연의 힘으로 저것들이 지금 저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새롭게 솟아오를 수 있었을까, 언제까지 존재할까, 어떤 사람들의 삶이 녹아들어 가 있을까. 저 낡은 집에 살던 어느 가족이 있었겠지, 자녀들은 장성해서 뿔뿔이 흩어졌을 테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낼 수 없었던 부모는 고집스럽게 낡은 집 한 채에 의지해 흐르는 시간 어찌하지 못하고 그곳에 남아 있었겠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을까. 굴뚝을 뚫고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대형 카페에 들어가 어느 한적하고 볕이 잘 드는 자리를 운 좋게 찾아낼 때면 가만히 테이블과 의자를 손으로 쓸어내려보곤 해. 어느 매장에서 왔을까, 그 매장 주인은 여기에 어떤 연이 닿아 제품을 납품하게 되었을까, 자신이 납품한 물건이 이렇게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줄은 알았을까, 이곳에 와보기는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아 볕을 쬐고 책을 읽노라면 그 평온한 시간과 인간의 손이 빚어낸 공간이 진실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그러니까 무엇을 보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어버렸어. 이건 멋을 부리거나 있어 보이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뜨거운 냄비에 손을 갖다 대면 화들짝 놀라듯 진짜로 그냥 그렇게 느낄 수 있게 되어버린 거야.


"행복하겠네"


행복하냐고?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해. 이전에는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생각, 예술 초년병들이 빠지게 되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처럼 남들과는 다르다는 일종의 우월감에 잠식되었던 것도 같아. 하지만 그런 우월감과 자의식 과잉은 그리 오래갈 수가 없어. 무언가에 심취한 사람들은 얼마 안 가 또 다른 심취한 자들의 세계에 가 닿게 되거든, 그것은 필연적으로 겸손을 불러와. 그래서 우월감은 결코 행복감을 안겨주는 불씨가 될 수 없어. 그보다는 일종의 신묘함, 끊임없는 경탄 같은 감정을 통해 행복감을 느낄 때가 많아. 미지의 영역과 인지의 영역 그 사이를 횡단하며 알게 되거나 느껴지는 것들, 혹은 전혀 알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말 그대로 온 세상의 경이로움에 대해 늘 감탄하느라 그저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느껴. 그리고 분명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곳곳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


책을 읽으며 사는 사람들, 음악과 미술에 심취한 사람들, 사진과 서예와 영화에 미쳐있는 사람들, 신체를 극한으로 단련하는 사람들, 종교와 학문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들, 그들은 분명 어느 순간 비슷한 영역에 들어서서 비슷한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 이것은 문예체의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야 심지어 자신의 일을 그저 열심히(하지만 여기서에 열심은 단순히 누구나 들이는 평범한 수준의 노력을 의미하지는 않아.), 상당한 수준의 열과 성을 다한 사람들 또한 비슷한 영역에 들어서기도 해. 일종의 통달, 득도한 것과 비슷한 경지라고 할까. 그들이 향하는 곳은 진짜 철학자가 되거나, 땡중 혹은 사기꾼 같은 일종의 사이비 교주가 될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들은 외로워져.


그들은 고립돼. 그들과 비슷한 길을 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탓이야. 어린 왕자가 이 행성 저 행성을 떠았던 이유와 같아. 어린 왕자는 여우를 통해 길들임과 길들여짐에 대해서 배우고 여우와 친구가 되지만 현실에서 길들임과 길들여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시간을 들여야 하고 서로의 세계를 탐색해야 해, 하지만 언어로는 자신의 세계를 충분히 설명해 낼 수 없는 탓에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 그래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어. 그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사람들 간에는 일종의 연민이 생길지도 몰라, 그리고 그것은 연대의식을 불러올지도 몰라. 그렇게 인간의 유한함과 불완전함을 깨달은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차릴 수 있어. 문제는 그런 사람이 드물다는 거야.


시간이 무한하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언제나 자신만만한 사람들,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잘못인 줄 모르는 사람들, 잘못인 줄 알지만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합리화하는 사람들, 자신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 타인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들, 싸우고 헐뜯고 뒷담화하며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들여다볼 줄 모른다는 거야.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보려고 애써야 해. 우리는 언제나 비교대상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인식해 나가기 때문이야. 내가 키가 큰 지 작은 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자상한지 폭력적인지, 이런 모든 것들은 비교대상이 있어야 측정이 가능해. 그래서 자기만 바라봐서는 결코 자기를 알 수가 없어. 끊임없이 타인과 외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타인을 보며 우리는 자신을 인지해. 비교대상이 되는 타인의 수가 적다면 오류에 빠질 수도 있어. 기준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래서 자주, 다양하게 들여다봐야 해. 이는 고되고 귀찮은 일이야. 언제나 좋고 귀한 것은 드물어. 자기를 들여다보려는 행위는 귀한 행위야. 그래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드물어. 그래서 그들은 외로워.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는 말, 이것을 그저 신화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해. 이는 어쩌면 가장 실존에 가까운 진실일지도 몰라. 나와 똑같은 사람, 나와 아주 비슷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잊을 만큼 극상의 기쁨을 줄 거야. 죽음은 소멸을 뜻해, 도플갱어와의 만남 이후의 죽음은 생물학적 소멸이라기보다 자아의 소멸이라고 보는 편이 더 낭만적일 것 같아.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아도, 나와 꼭 닮은 사람, 세계를 나와 같은 방식으로 인식하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 더 이상 내 자아는 필요가 없어질 테지. 그가 곧 나고 내가 곧 그일 테니까. 도플갱어를 만나는 일을 두려움에 대한 상징으로 여기지 않아도 좋겠어.


공상은 때로 망상이 되고 때로는 현실을 위한 발판이 되기도 해. 사실 때때로 현실과 상상, 공상과 망상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해.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구분 지을 수 없다는 여느 과학자들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 애매한 경계에 대한 의문이 가끔 들기는 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수많은 경계 사이를 넘나드는 것, 그것이 삶이 아닌가 싶어.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간다는 것도 그 둘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다고 생각하면 어느 순간 겁이 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해.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책을 읽다가 미쳐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불필요한 생각, 의미 없는 망상에 빠져 현실감이 점점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다가 보이는 것들을 잃어버릴 것 같다는 공포감. 때때로 그런 감정들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어서 읽던 책을 가만히 덮기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