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으로 세상을 분석해 내는 기쁨
이런 융합이 좋다. 섞여 듦이 좋다. 다양한 시선이 좋다. B를 통해 A를 설명하는 방식이 좋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원피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읽어보지 않았어도 들어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 대중성을 가진 작품을 소재삼아 철학을 소개한다. 아니 철학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반대일지 모르겠다. 철학을 소재삼아 만화를 소개하는 것도 같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 그 양측의 세계 어딘가에 속한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저자는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두 영역을 엮어 각각의 세계에 친밀하게 간섭한다. 저자는 재미있는 놀이를 실컷 즐겼음이 분명하다. 저자가 만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곱씹으며 어떤 철학자의 사상으로 이 장면을 설명할지 고민했을 것을 상상하니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럽다.
책은 가장 먼저 만화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원피스의 세계관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 다음 소년만화의 가장 큰 핵심 소재인 우정에 대해 설명하고 그다음 챕터부터는 같은 속성을 지닌 등장인물 몇 명을 엮고 그들 간의 공통점을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원피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장만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은 우정인데 이는 청소년 시절 우리 모두가 거쳐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힘이 곧 정의인 만화의 세계에서 인물 간 관계를 맺는 방식은 어찌 보면 정해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원피스 세계의 인물들은 현실의 '힘' 자체를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것이 형체를 갖추면 '무력'이 되고, 타인에 대한 강제력인 경우에는 '권력'이 되며, 칭호나 직위에 부여되면 '권위'가 되고, 관념에 스며들면 '명성'이나 '위엄'이 되며, 조직화되면 '위계'가 된다. 자신의 힘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확신하는 자들은 신이라 자처한다. - 34P
힘이 곧 기준이 되는 세계에서 조직을 구성하는 방식은 유일하다. 그것은 바로 힘으로 구속하는 것이다. 신에 가까운 무력을 지녔던 번개인간 에넬은 자신이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라고 생각해 동료를 만들지 않는다. 그에게 타인이란 그저 유희를 위한 도구이거나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한 재료에 불과할 뿐이다. 흰 수염 해적단의 대장 흰 수염이 일당을 영입할 때 하는 말은 "내 아들이 되어라"였다. 그는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나 가부장적 권위를 초월하지는 못했다. 그의 해적단은 모두가 탐낼 만큼 강하고 끈끈한 의리로 뭉쳐있었으나 힘이 기준이 되는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비단 해적들의 조직구성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정의의 세력이라 불리는 해군이나 그 외 만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단체들은 모두 이 힘의 규칙에 종속된다. 거의 유일하게 주인공인 루피의 밀짚모자 해적단만 이 힘의 논리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것을 이 유쾌한 철학책은 들뢰즈의 '리좀', 대상과 유관한 사물로 대상을 비유하는 수사법인 '환유',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바흐친의 '카니발', 데리다의 '환대'를 통해 설명한다. 들뢰즈의 리좀으로 중심 없이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관계성을 설명하고 밀짚모자라는 환유적 비유는 루피의 다양한 관계성을 상징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노예의 자유와 카니발, 자신과 전혀 다른 이방인을 초대해야 한다는 데리다의 환대의 개념 모두 비슷한 맥락 안에서 주인공 밀짚모자 일당의 관계성을 설명해 낸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자발적으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이들의 집합체, 이것이 밀짚모자 해적단의 관계 맺음이며 이들은 서로가 모두 다르면서도 각자 확고한 어떤 상징들을 구축하는데 그런 자들이 모여 만화 속 세계의 모든 이들을 대표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주인공 루피를 "연장"이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한다. 공간에서 부피를 갖는 것은 모든 물체의 특성이며 공간이란 z, y, z의 좌표 위에서 움직이는 삼차원의 세상을 뜻한다. 이런 특성을 가진 루피는 뻗고, 쓸고, 부풀리거나 회전하며 싸운다. 루피는 공간, 즉 실체라는 개념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그는 여러 모험을 거치며 과학, 합리성, 유물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점차 성장해 나간다. 그리고 결국 자유와 기쁨을 구현한 인물로 각성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루피는 몸과 물질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것이 작가의 해석이다. 로빈에 대해서는 무질서가 잉태하는 질서, 알면 알수록 모른다는 것이 일깨워지는 역설이라는 개념을 통해 캐릭터의 수수께끼적 속성을 설명해 낸다. (사실 어려워서 잘 모르겠다.)
여러 인물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저자는 철학과 원피스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한다.
뉴하프가 여전히 논쟁이 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같은 인간 사이에서도 분열이 있고, 그 분열된 둘에 속하지 않는 제3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다른 모든 차원에서도 동일한 차별을 저지른다. 원피스 세계는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지 않는다. -중략- 이들의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다른 형상의 이들을 구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애당초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다. 나는 이것이 원피스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아름다운 전언이라고 믿는다. - 25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