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

기다림의 양면성

by 정 호

Sometimes I feel so happy

Sometimes I feel so sad


얼마 전 감상했던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울려 퍼지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 잔잔하지만 강하게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그 노래가 영화 접속에서도 울려 퍼진다. 접속이 1997년 작이고 퍼펙트 데이즈가 2024년 작품이니 사실 접속을 먼저 보고 퍼펙트 데이즈를 보며 반가운 마음을 느꼈을 사람들이 더 많았겠지만 나는 그 반대의 순서로 영화를 보았다. 좋아하는 노래나 좋아하는 장소, 좋아하는 장면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할 때 반가움을 느낀다. 반가운 마음, 오랜 세월 연락이 끊어진 옛 인연을 만난 것처럼 반가움은 그 자체로 영화에 대한 호감을 높인다.


영화 접속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다. 삐삐와 유니텔을 사용해보진 않았지만 다모임과 싸이월드를 애용했던 세대로서 채팅을 하기 위해 누군가를 기다렸던 그 마음의 모양새를 금세 따라 그려볼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 허물없던 친구들과 대화하기 위해 메신저에서 기다려야 했던 시간들, 그 풋풋하고 설레는 마음이 떠오른다. 영화 접속은 PC통신이라는 당시로서 최첨단의 소재를 통해 두 주인공의 기다림을 연결시킨다. 동현(한석규)은 옛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다. 그는 연락이 끊어진 대학시절 연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무의미한 세월을 소진한다. 수현(전도연) 역시 기다림의 저주에 빠진 여자다. 자꾸만 자신에게 여지를 주는 친구의 연인(기철)을 짝사랑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기철(김태우) 곁을 맴돈다.


기다림의 저주에서 허우적거리는 남녀가 우연히 PC통신을 통해 만나 얼굴도 본 적 없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그들은 서로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물음 뒤에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림의 시간은 설렘이자 고통이다. 그것은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시간이지만 그런 기다림이 주는 내밀함과 진지함이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채팅으로 서로의 감성을 나누고 때로는 공격하며 서로의 내밀한 상처를 찌른다. 글이 말에 비해 가지는 강점은 자기 생각을 곱씹어, 보다 본질에 가까운 내용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취향을, 감성을, 본질을 나누며 얼굴도 본 적 없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말이 안 되는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감성만큼 강한 것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동시에 들기도 하여 넷플릭스 연애 실험 블라인드 러브를 이 기회에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말아요.
잊든가. 잊을 수 없다면 가서 당신을 보여줘요.

극 중 동현(한석규)은 수현(전도연)에게 짝사랑만 하지 말고 잊든가 부딪혀보라고 조언한다. 이는 영화에서 짝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권하는 조언이었지만 나에게는 전혀 다른 소리로 번역되었다. 옛 영화를 보다 보면 배우들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유독 옛 영화를 보면 젊음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된다. 젊음, 기다림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두 개의 테마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강한 향수를 불러왔다. 하지만 젊음도 기다림도 이제는 기다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이며 기다린다 한들 다시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한석규의 조언대로라면 잊거나 만나러 가야 할 텐데, 만나러 갈 수는 없으니 잊는 수 밖엔 없겠다.


저.. 이수현이에요 몹시 기다렸어요.
저를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내일이 마지막이군요. 극장 앞에서 기다릴게요.

통신이 두절된 동현(한석규)을 만나기 위해 수현(전도연)은 그가 일했던 방송국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동현(한석규)이 방송국을 그만둔 뒤다. 수현(전도연)은 기다렸다는, 기다린다는 연락을 남긴 채 한석규를 찾아 헤맨다. 그녀는 끊임없이 기다린다. 기철(김태우)을 기다리고 동현(한석규)을 기다린다. 영화의 말미에 동현을 등지고 이제 당신이 떠나면 나는 또 혼자가 되겠다고 되뇌는 그녀의 목소리는 기다림의 끝에 절망을 맛본 동현의 발걸음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렇게 짝사랑에 실패한 여자와 실패한 옛사랑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남자는 각자의 상처에서 벗어나 마침내 마주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활짝 웃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두 주인공의 이야기 못지않게 매력적이었던 것은 추상미 배우의 미모였다. 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 아름다움에 새삼 놀랄 때가 많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또 그렇게 새삼스럽다. 카메오를 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는데 영화 접속에서 인상 깊었던 카메오가 둘이다. 한 명은 택배기사로 나오는 이범수인데 이범수는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어서 그 자체로 웃음포인트가 되었다. 씬 스틸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단 한 번의 등장이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또 다른 한 명은 야인시대의 신마적으로만 알고 있던 배우(최철호)였는데 서점 주인으로 등장해서 그 이질적인 이미지의 충돌이 재미있기도 했다.


스토리를 보면 별 것 없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매력을 갖는 이유는 배우들의 한 시절이 담겨있다는 사실과 그 시대적 배경으로만 풀어낼 수 있는 감성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참 느리다. 나이를 먹을수록 느린 영화가 좋아진다. 대사, 배경, 음악, 표정 등 영화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곱씹을 여백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화예술을 감상하는 이유는 결국 그 안에서 나와 맞닿아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빠른 감상은 순간적인 쾌감과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느림의 미학이 빚어내는 내면의 나와 만나는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없게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현(한석규)은 자신을 기다려온 수현(전도연)을 만나기 위해 호주로 떠나기 전날 밤 수현(전도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극장 앞으로 간다. 기다리는 여자와 기다려본 남자. 그들은 그렇게 기다림이라는 마를 붙들고 인생의 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들이 더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응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낭만 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