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고
내내 웃다가 결국에 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우리를 울리는 이유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웃음이 거짓이나 가식에 의해 꾸며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금세 눈치챌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일상을 살아가며 가끔씩 피워내는 그 미소에 우리는 함께 미소 짓고 그것이 소중하게 이어졌으면 하고 은근히, 혹은 대놓고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보여준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가 어땠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지만 몇몇 단서를 통해 공공화장실 청소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집안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는 어떤 이유로 세속의 부귀영화를 뒤로한 채 자기의 세계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 선택은 때로는 충만한 행복을 허락하지만 때로는 외면할 수 없는 외로움을 가져오기도 한다. 선택 뒤에 따라오는 모든 결과를 본인이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때때로 몰려오는 막대한 감정의 파동은 여전히 급작스럽다. 그래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온몸으로 그 충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울음은 터져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다 큰 어른의 울음, 밝아 보이거나, 나이가 많거나,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어떤 이의 울음에 동요하게 된다. 그것은 파장이 큰 탓이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웃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웃음은 헤프지 않다. 명확하게 자신의 기준에 따라 행해지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예에 가깝다. 그는 타인을 도우며 미소를 짓는다. 공중화장실에서 청소를 하는 그는 어느 날 화장실에서 혼자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호들갑을 떨지 않고 그저 조용히 울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밖으로 나와 아이를 달래는 동안 다행히도 아이의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다급하게 다가온다. 아이를 낚아채듯 히라야마로부터 빼앗은 뒤 엄마는 가장 먼저 물티슈로 아이의 손을 닦아낸다. 경멸하듯, 혹은 경계하듯 히라야마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엄마는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아이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난다. 불쾌했을 법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라야마는 뒤돌아서는 아이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공중 화장실 외벽이 투명하여 당황한 외국인에게 무뚝뚝하지만 정확한 바디 랭귀지로 투명 불투명 유리를 변환시키는 이용법을 알려준 뒤 미소 짓는 그의 모습과 대중목욕탕에서 목욕 후 잠든 노인을 향해 부채질을 해주는 그의 모습을 통해 그가 타인에게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각박하고 팍팍하다 못해 타인이 두려울 지경인 세상에서 그의 태도는 그 자체로 귀한 따듯함을 느끼게 한다.
주인공은 작은 것들에 정성을 다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각 집 앞에 나와 빗자루질을 하는 어떤 이의 슥삭거리는 비질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다. 일어나자마자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어차피 더러워지는데 뭐 하러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며 핀잔을 주는 동료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자기 집 화장실인 것처럼 자신의 일에 그저 진심을 다한다.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를 메꾸며 쏟아지는 햇볕을 바라보며 그것을 사진에 담기도 하고, 품 안에 신문을 접어 만든 간이 화분을 가지고 다니다가 작고 예쁜 새싹을 발견할 때면 그것을 조심스레 옮겨 담아 집에 가져와 기르기도 한다. 별 것 아닌 이런 순간들을 마주하며 히라야마는 미소를 잊지 않는다.
주인공은 혼자만의 행복을 누릴 줄 안다. 날씨가 좋건 궂건 그는 아침에 집을 나설 때면 늘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출근길 차에서는 오래된 라디오 테이프를 틀어 자신만의 취향을 정립한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음악과 혼연 일체가 된 채 충만한 감성에 젖는다. 스쳐 지나는 행인을 바라보며 웃고 흔들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는 반복되는 하루에서 행복을 바라볼 줄 안다. 그 행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만들어낸 행복인 탓에 그는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다.
Sometimes feel so happy.
Semetimes feel so sad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는 그와 우리의 인생을 대변한다. 주인공이 사는 허름한 주택단지 뒤로 화려하게 빛나는 도쿄 스카이트리가 나온다. 전망대이자 관광지인 그곳은 화려한 빛을 뽐내며 주인공의 처량해 보이는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저곳에 있을 때 행복했고 이곳에 있어서 불행한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인 것일까. 무엇이 명이고 무엇이 암인지 모르는 것이 언제나 인생이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선택이라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일이기나 한 것일까. 그저 누구나 쉽게 말하듯 주어진 곳에서 행복을 찾는 것만이 유일한 답인 것일까. 무엇이 정답인지 여전히 알지 못하기에 주인공 히라야마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토록 기쁘면서도 슬퍼 보이는 울음을 터뜨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는 거의 주인공의 1인 극처럼 진행되지만 주인공 옆을 순간순간 스쳐 지나는 조연들을 통해서도 하나의 화두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사랑받으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히라야마도, 가출한 히라야마의 조카 니코도, 히라야마의 화장실 청소 동료 타카시, 타카시가 좋아 했던 여자친구, 타카시의 귀를 좋아했던 장애를 가진 타카시의 친구, 히라야마가 자주 들르던 술집의 사장, 그 술집 사장과 칠 년 전 이혼한 남편, 그 술집에 놀러 오는 단골 고객들, 히라야마가 화장실에서 쪽지를 주고받으며 빙고 게임을 하는 무명의 누군가, 주인공이 애처롭게 바라보는 정신 나간듯한 어느 광인. 모두 각자의 상처가 있지만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한없이 애처롭고 사랑스럽다.
일상 속 행복, 소확행, 자기만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려낸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아름다우면서 시리다. 생각해 보면 아름답다는 것은 일정량의 슬픔을 수반하는 것 같다. 그것이 삶의 본질적인 모습이기에,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것은 오히려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그것은 거짓된 아름다움이기에. 시리고 아프지만 아름답기도 한 것, 상처받고 도망치기도 했지만 붙잡고 싶고 매달려보고 싶기도 한 것. 그런 것이 삶이고 삶의 아름다움 아닐까.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를 메우며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가리켜 일본어로는 '코모레비' 한국어로는 '볕뉘'라고 한다. 좁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틈 사이를 빼곡히 메우며 쏟아져내리는 햇빛의 존재처럼, 우리도 각자의 삶의 틈바구니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빛의 조각들이 분명히 어딘가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어딘가를 꾸준히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강한 여운을 남기며 영화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