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마침내 예술 그 자체가 된 한 남자

by 정 호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고 가부키 명문가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에게 맡겨진 소년 키쿠오. 운명이 결정짓는 세계에 이방인으로 뛰어든 키쿠오는 명문가의 아들 슌스케와 부딪히며 라이벌로 성장하게 된다. 서로의 길을 시험하는 치열한 경쟁에 놓인 두 사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름 국보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데... 최고를 향한 열망, 서로를 뛰어넘어야 한다. - 영화 국보 소개


가부키 세계에서 혈통 없이 국보가 되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예술을 다룬 영화가 그다지 예술적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영화 국보는 그야말로 예술적이다. 인물의 감정을 표현해 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화면의 미감이, 대사가, 서사적 단단함이 그야말로 대단하다. 이 모든 것들이 영화 내내 매끄럽게 연결되고 서로를 감싸며 치열하게 진행된다. 한 인물의 생을 밀도 높게 그려내기 위해 치밀하게 짜인 장면들은 관객을 압도한다. 그에 감응하듯 관객들은 행여 한 순간이라도 놓칠세라 한 조각의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는 듯 몰입하여 스크린을 응시한다.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를 마주하며 관객은 생각에 잠긴다.


주인공 키쿠오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가문이 멸문한다. 우연한 기회에 가부키 세계 명문가에 연습생으로 들어가게 된 키쿠오는 적통자 슌스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다. 두 사람은 서로지하고, 때로는 상처 주기도 하며 치열한 생애를 보낸다. 그렇게 그 둘은 평생에 걸쳐 친구이자 라이벌로, 증오의 대상으로, 후견인으로 변모해 가며 감정의 파도를 넘나 든다. 예술가로서 정점에 서고 싶다는 각자의 열망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우정이나 애증이라는 단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관계는 세월이라는 가로축과 열망이라는 세로축이 겹겹이 포개지며 폭풍 같은 굉음을 빚어낸다. 하지만 예술을 향한 각자의 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인생의 후반기에 마침내 안정적으로 일치하게 된다.


키쿠오: 무서워, 저 사람은 괴물이야.
슌스케: 아름다운 괴물이야

키쿠오와 슌스케가 아직 학생일 때, 공부를 위해 당대 최고의 온나가타인 인간 국보의 공연을 보러 간다. 그리고 두 청년은 희열에 압도된다. 자신들이 도달하고픈 영역에 먼저 도달한 사람을 앞에 두고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두 청년, 그들은 젊음의 눈에 어떤 미래와 희망을 담았을까.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키쿠오와 슌스케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서로에게 질투심을 넘어 적대감을 느낀다. 최고의 온나가타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내내 슌스케는 키쿠오의 재능을, 키쿠오는 슌스케의 혈통을 지켜보며 자신이 영영 가질 수 없는 것임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당주인 하나이 한지로가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영광의 자리를 자식인 슌스케가 당연히 이어받을 거라 생각했던 모두의 예상과 달리 한지로는 혈통(슌스케)보다 재능(키쿠오)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지로와 키쿠오의 인생을 파국으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내겐 나를 지켜줄 피가 없어.
네 피를 컵에 담아 벌컥벌컥 마시고 싶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무대에 오르기 직전, 키쿠오는 마침내 마주한 꿈의 현실 앞에 압도된다. 실수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 같이 느껴지던 그 순간, 키쿠오는 혈통을 중시하는 가부키 사회에서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처지가 몹시 불안하다. 그럼에도 키쿠오는 결국 해내고 만다. 영광의 무대에서 열연을 펼치는 키쿠오를 보며 완벽한 친구의 재능에 압도된 슌스케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관객석을 떠난다. 그리고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가문과 연을 끊고 살아가게 된다. 키쿠오의 인생을 보면 불행하기 그지없다. 가부키 명문가의 당주 눈에 띈 연회자리에서는 아버지를 잃고, 당주의 뒤를 잇는 주연으로 인정받는 무대를 치르며 친구를 잃는다. 이후 슌스케가 나타나지 않아 한지로의 이름을 계승하는 무대에서는 당주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심지어 피를 토하며 죽음을 앞둔 당주는 평생토록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자기 자식(슌스케)의 이름만을 외친다. 죽음 앞에서는 결국 가족밖에 없는 것일까. 키쿠오는 공허하고 서글픈 마음을 느끼며 결국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세상에 혼자 떨구어져 버렸음을 느끼기라도 한 듯 두렵고 공허한 눈빛으로 한지로를 바라본다. 키쿠오가 예술가로서 인정받을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의 삶은 파괴되어 간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어야 하는 것일까. 등가교환의 법칙은 예술가의 삶을 더욱 처절하게 몰아세운다.


예술가는 무엇에 일생을 거는 것일까. 시작은 돈이나 명예였을지 모르겠으나 깊어지는 예술혼은 그런 것으로는 메울 수 없는 심연의 갈증을 유발한다. 키쿠오도 슌스케도 한지로도 모두 예술에 미친 사람들이다. 예술의 궁극적 지향점인 '아름다움' 그야말로 '미'에 미친 사람들이다. 그것은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지점, 오직 자신만이 인식하고 도달할 수 있는 어느 극한의 한 지점이리라. 고뇌하고 수련하고 현실이 짓이겨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오직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예술의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예술가의 삶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마저 자아내게 한다.


영화는 참으로 아름답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장면의 연속이지만 등장하는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키쿠오는 국보가 되기까지 많은 것을 잃는다. 가족과 친구와 연인을 잃고, 때로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참아내고, 성공을 위해 마음에 없는 행위로 타인을 이용하기도 한다. 슌스케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집에 굴러들어 온 돌(키쿠오) 때문에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으니 그 박탈감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당주인 한지로 역시 슬프다. 자식보다 재능이 뛰어난 연습생에게 후계자를 물려주겠다고 결심했을 때 부모로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한지로의 아내 사치코, 키쿠오의 연인이었다가 슌스케와 결혼한 하루에, 키쿠오의 재능을 알아봐 음지의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한 아내 후지코마, 키쿠오와 후지코마의 딸, 키쿠오가 자신의 재기를 위해 이용하는 아키코, 모두 예술가의 삶에 휘말려버린 피해자들이다. 국보가 된 키쿠오를 인터뷰하며 아버지로서는 인정할 수 없지만 예술가로서는 인정한다는 딸의 마지막 전언은 가슴 시리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서야 도달한 극한의 영역에서 키쿠오는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인간은 홀로 될 때에야 궁극의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다른 이의 상처에 눈 감고 자신의 행복마저 저버리면서 오직 배우로서의 삶을 추구한 한 예술인의 삶, 결국 키쿠오는 국보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보는 풍경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즐겁고 아름다웠고, 꿈과 같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가부키 하면 막연하게 괴상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의 한 장르문화에 대해 알게 되어 다행스럽다.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 한 편을 놓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영광을 위해 일생을 건 두 남자의 아이러니한 삶. 서로를 질투했던 두 남자, 평온과 일상을 잃어갈수록 아름다움에 근접할 수 있었던 두 남자. 어쩔 수 없이 예술에 매료되어 버린 사람들의 아름답고 처연한 삶을 담아낸 영화 국보는 오래도록 회자될 영화가 될 것 같다. 참으로 아름다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