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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ug 12. 2020

우리는 모두 자신이고 싶다

나를 가두지 말라

나이를 먹을수록, 활동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우리는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고 그것들은 나의 존재 위에 켜켜이 포개어지며 상황마다 나를 규정짓는 기준이 되어 나의 행동양식을 결정한다.


나이가 어릴 때에는 부여받는 역할이 그리 많지 않다. 부모 앞에선 자식으로, 형제간에는 형이나 누나이거나 동생으로, 학교에서는 학생이자 제자이자 친구로서의 역할 정도를 부여받게 되고 이것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큰 폭의 변화 없이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학교에서 리더의 역할을 맡거나 다양한 교외활동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 역할의 범위는 다소 넓어지겠으나 "미성년", "학생"이라는 보다 큰 틀이 존재함으로써 다른 역할은 기존 나의 역할들과 상충된다기보다 앞에서 이야기한 큰 틀의 하위 역할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할 갈등
개인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역할들 간에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우리가 나이를 먹어가고 여러 소속집단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는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유재석의 놀면 뭐하니라는 프로그램에서 유재석과 이효리, 비, 각 영역의 정점을 찍은 세명의 스타가 싹쓰리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해서 활동하며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 그 방송에서 비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여기서나 이런 취급을 받지 다른데 가면 나도 나름 한가닥 하는 사람이야


글로 적혀있어서 비가 정색을 하고 이야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굉장히 재미있고 유쾌한 장면이었다. 소위 한가닥 하는, 사회적으로 한 자리씩 차지하는 사람들도 어떤 모임에서는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다. 비라는 대단한 스타가 망가지고 구박받는 모습은 이런 묘한 이질감을 빚어내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한 개인이 서로 다른 역할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이 이처럼 타인으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런 상황을 맞이하는 본인은 심각한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사회적으로 사장님 회장님 소리를 듣다가 집에 오면 천덕꾸러기 막내 취급을 받는다던지, 회사에서 나름 중역의 위치에까지 오르더라도 어린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개똥이 소똥이로 불리며 놀림을 받는다는 등의 이야기는 사실 혼란스럽다기보다 즐거움을 주는 요소가 더욱 크지만 어떤 개인에게 있어서 이런 상황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견딜 수 없는 괴리감처럼 느껴져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프레임


역할 갈등과 더불어 개인을 짓누르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있다. 그것은 무엇답다는 틀, 즉 프레임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브런치, 블로그 등 개인의 의견을 발산하고 자신의 생각을 지지받기에 좋은 환경을 갖춘 플랫폼이 다양하게 형성되고, 이것들이 우리의 삶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면서 이런 프레임을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었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 나는 전통적인 며느리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용감하게 던지고 있는 B급 며느리라는 책을 보면 그동안 관습과 전통으로 포장되어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며느리들의 서러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영화로 보았다. 책과 영화 사이에 얼마큼의 간극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화를 보며 대한민국에서 여자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지내는 여성들이 느끼는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런 프레임은 특히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직업군에 보다 정교하고 깐깐하게 씌워진다.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진보와 보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이런 이미지가 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가 진보의 이미지에, 보수가 보수의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발언이나 행동을 할 때 대중은 그 정치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때로는 진보가 보수의 정책을, 보수가 진보의 정책을 지지할 수도 있으련만 한번 포지셔닝된 위치에서 그 프레임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예인들 또한 이런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유명해지기 전, 뜨기 전에는 예능프로그램에도 나오고 인터뷰도 자주 하고 가능하면 매체에 얼굴을 많이 비추기 위해 노력하다가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서게 되면 그들은 전략적으로 노출을 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원빈처럼 극단적으로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기에 어떤 마음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으나 본인들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작품과 CF를 가려가며 받는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한번 굳어진 연예인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렇기에 한번 조연배우, 웃긴 배우, 악역, 국민 여동생, 이런 고정된 이미지가 자신에게 덧씌워지는 것을 배우들은 무척이나 두려워한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고 그만큼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여러 가지 역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들이자 사위이며, 아버지이자 남편이고, 장남이자 오빠면서, 선배이자 후배이고, 공무원이자 교사이며 학생이다. 그 외에도 남자, 30대, 성당에 잘 나가지는 않지만 천주교, 전라도 사람, 왼손잡이, 글 쓰는 취미가 있는 사람, 어떤 모임에선 회장이지만 어떤 모임에선 총무이고 어떤 모임에선 유령회원이기도 하다. 늘어놓고 보니 별것 없는 것 같지만 이 별것 없는 것들 안에서도 프레임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교사라는 틀 하나만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렇다. 교사라는 직업을 갖기 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들을 교사가 된 뒤로 듣게 된 경우가 많다. 그 말들은 때로는 농담으로, 때로는 놀람으로 발현되어 나에게 쏘아진다.


교사가 그렇게 입어도 돼?
교사가 그런 말을 써도 돼?  
교사가 그렇게 행동해도 돼?
교사가 그런 것 살 돈이 있어?
교사가 교사가 교사가...


교사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 심지어 옷차림과 소비생활까지 검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사회적인 기대치가 높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처음에는 그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 기대에 부응하며 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과 상황들이 반복될수록 가슴 한편에 답답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간은 본디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원래 잘하지도 않았지만 희한하게 하지 말라고만 하면 더 하고 싶어 지는 이상한 심리가 작용하기에 아마도 이런 답답함이 솟아나는 것 같다.  


어떤 프레임에 갇혀서 그 프레임에 어울리는 행동양식에 따라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갑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답답한 마음을 풀어놓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답답하다고, 그만 좀 하라고 외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활동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 취미생활과 연결이 된다. 글쓰기나 영상 촬영, 운동이나 악기 연주, 무용, 발레, 꽃꽂이, 제빵 등 누군가는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보통의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취미생활은 나를 찾아가는 중요한 시간이다.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워라밸을 고민할 필요도, 나를 찾아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필요도 없는 행복한 일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연애는 우리를 불타오르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나를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를 먹고 옛사랑을 만나는 일은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 인정받았던 시절의 추억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나의 브런치 아이디 "나는 나" 역시 그런 의미에서 만들었다.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역할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나를 나답게 한다는 것은 자유를 의미하며 나는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체로 존재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이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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