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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Nov 15. 2020

왜냐고 묻지를 마라

세상 피로도의 총량을 높이는 일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 조용필 -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실린 가사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왜냐고 묻지 마라 네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나만의 길을 가려한다는 의미로, 나의 행위에 대해 왜냐고 묻는 것을 조용필은 진즉에 단호하게 거부하며 자신의 노래 가사에 이런 마음을 표현했었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호기심을 가지라고 말하며 "왜"라는 물음을 항상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어른들의 지시에 아이들이 "왜요?"라고 대답하는 순간 "왜요는 일본 사람이 덮는 담요야~"라는 어린이들이 알아듣기엔 다소 힘든 농을 던지며 은연중에 아이들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에 불편해하는 심기를 드러낸다.


백번 양보해서 군대와 같이 의사결정이 소속 구성원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특수한 조직에서는 빠른 결정을 위해 왜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금기시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항상 "왜?"라는 질문을 자신과 타인에게 던지는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왜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대학시절 말도 안 되는 똥 군기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동기는 하나라는 것을 알려준다는 명분으로 단체 얼차려를 시킨다거나, 선배의 말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정이 다되어 가는 시간에 전화를 해서 술자리에 불러낸다거나 길에서 마주쳤을 때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릇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거나,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여 술을 마시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술잔을 들고 인사를 오지 않은 것을 굳이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 술자리에 만나서 그때 왜 인사를 오지 않았느냐며 갈군다던지 하는 일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가혹행위의 근거가 어떤 특별한 신념이나 철학에 의한 것이 아닌 고작 한 두 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때로는 "억울하면 대학에 빨리 오지 그랬어"라는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나이 많은 늦깎이 후배들에게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것이 과연 지성을 갖춘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 맞는지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을 도대체 왜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인가. 왜 우리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되는 것인가, 이런 행위가 그들에겐 어떤 권위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동기들과 함께 대학시절 내내 곱씹고 또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왜냐는 질문을 던졌던 시절로 기억된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어떤 장면에 대해서 이해되지 않고 도무지 자신의 상상력만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일에 대해 왜냐는 질문을 던지듯, 나 또한 그때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가 왜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던 것 같다.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을 맞닥뜨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래서 결국 자신만의 답을 찾아 그 답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기도 하고, 끝끝내 답을 찾지 못해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마음 한구석에 풀리지 않은 의문을 꽁꽁 싸매어 풀어내지 못한 채 끌어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아이들이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던지는 왜라는 질문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어른들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에는 진정으로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고 궁금해서 물어오는 순수한 차원의 접근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 않다. 만약 이런 질문조차 기분이 나쁘다면 내가 권위에 잡아먹힌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될 일이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성인들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에는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라기보다는 답정너스러운 폭력성이 숨어있을 때가 종종 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다.


너는 왜 그 차를 샀어?
너는 왜 결혼을 안 해?
너는 왜 그 사람을 만나?
너는 왜 아이를 낳지 않아?
너는 왜 그 회사를 그만뒀어?
너는 왜 그런 음식을 좋아해?
너는 왜 가족들과 그렇게 지내?  
너는 왜? 왜? 왜? 왜? 왜~~~???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이런 경우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선택을 한 타인을 비판하거나 지적하고 싶은 마음 혹은 교정해주고 싶거나 훈수를 두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 왜에?라는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런 경우 라는 말은 무섭고 폭력적이다. 자신의 생각이 맞고 남의 생각은 틀렸다는 인식이 근본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갈등의 출발점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로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겠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

 - 김상용 -


세상사가 복잡해진 만큼 개인의 삶 역시도 복잡해진다. 이토록 번잡하고 답을 찾기 어려운 세상에서 나의 방향과 다르다고 해서 타인의 선택을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지난하고 고단하여 김상용 시인은 왜 사냐건 그저 웃는다고 말했을까. 타인의 미소와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말이 감추어져 있는지 들여다볼 줄 아는 것. 그것이 왜냐고 묻는 것보다 서둘러 갖추어야 할 어른의 미덕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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