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추억의 한 페이지
초등학생 시절 공책에 에반게리온을 그렸던 기억이 있다. 교실에 으레 한 두 명씩 있었던 로봇을 잘 그리는 남학생 중 하나였던 나는 사이버포뮬러에 나오는 자동차를 고무찰흙으로 만들고 공책에는 에반게리온을 그렸다. 그래서일까. 기억에 남는 애니메이션을 꼽으라면 늘 제일 먼저 에반게리온이 떠올랐다. 학창 시절 학교 앞 만화 가게에서 빌려봤던 수많은 만화 중 왜 유독 에반게리온이 먼저 떠올랐을까. 한컷 한컷 넘겨보던 흑백의 만화책 장면이 눈앞에서 물 흐르듯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애니메이션의 연출과 색색의 컬러감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감동이 잊히지 않아서였을까. 애니메이션을 많이 접하지 않아서 단지 그 희소성 때문에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일까. 책과 달리 음향이 덧입혀져 더 감정적으로 각인이 된 탓일까. 에반게리온은 만화책으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참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중학생 시절 어느 즈음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만화를 한창 좋아했던 어린 시절로 잠시 돌아가고 싶을 때면 가끔 만화방에 들러 에반게리온을 들춰봤다. 어린 시절엔 어떤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무언가 종교적이고, 상징적이고, 세기말적인 그 기묘하면서도 매력적인 분위기에 취해 감각적으로 만화를 봤다. 그러다 몇 년 전쯤 TV판 애니메이션 26편을 정주행 하고 여러 해석을 찾아보며 연신 감탄하다가 후속작인 극장판으로 서, 파, Q, 다카포 네 편의 이야기가 더 있고 TV판 애니메이션 결말을 보충하기 위해 EOE이라는 작품이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묘한 결말과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 그에 더해 아직 보지 못한 극장판이 다섯 편이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왠지 에반게리온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26편의 애니메이션과 5편의 극장판을 연달아 보고 여러 해석을 찾아보며 에바게리온을 충분히 즐겼다.
에반게리온은 성공한 애니메이션들이 으레 그러하듯 여러 요소가 적절히 섞인 수작이다. 나약한 주인공이 로봇에 탑승하여 미지의 괴수를 무찌른다는 기본적인 영웅 서사 안에 여러 종교적인 상징과 조연 캐릭터들의 서사를 적절히 버무린다. 하나하나 설명하고 해석하고 감상을 남기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저 오랫동안 함께 했던 친구를 떠나보내는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에반게리온을 보는 내내 뭐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