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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Sep 23. 2020

모든 해방은 당사자로부터 비롯된다

자유는 스스로 쟁취하는 것

1968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하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반전 운동은 그 규모가 점차 커지며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으로 확장되었다. 그로 인해 기존에 사회 질서라고 여겨졌 각종 억압들에 대하여 항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남녀, 인종, 신분, 종교,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슬로건을 필두로 68 운동이라 불리며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확산된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김누리 교수는 이 지점에서 하나의 주목할만한 이야기를 던진다. 어떤 종류의 억압이 되었건 사실상 모든 종류의 해방은 당사자가 쟁취해냈다는 이다. 즉 해방을 쟁취하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결국 당사자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숙명과도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가끔 예외적으로 자력으로 쟁취하지 않아도 외부의 힘으로 인해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경우가 물론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해방을 위한 스스로의 노력이 없었다면 외부의 도움으로 인한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되지 못하고 일시적이거나, 혼란스러운 해방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 자명하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목소리를 냈던 수많은 흑인 인권 운동가들의 삶이 그러했고 갑오개혁에 이르러 신분제도가 철폐되기 전까지 목숨 걸고 신분제 철폐를 외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이 이를 대변한다. 자신의 삶을 옥죄고 있는 유무형의 억압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저항하는 것 말고는 달리 기댈 곳이 없다.


이것은 인종차별이나 신분제도같이 전 지구적으로 발생했었던, 혹은 발생하고 있는 거대한 억압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개개인이 겪고 있을, 작다고 한다면 작디작을 각종 억압에 있어서도  해결방법은 마찬가지로 유일하다. 누군가가 나서서 내 대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일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저항하고 소리치고 뒹굴어봐야 한 번 쓰윽 쳐다보고 지나가는 것이 타인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깨달은 사람만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 안에서 하루라도 빨리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답답함을 느낀다.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기에 재미있는 것 아니겠냐는 말도 있지만 사실 생각대로 되지 않기에 재미있는 일보다는,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힘든 일이 더욱 많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을 하나하나 열거하려면 하룻밤을 꼬박 새도 모자랄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 인생은 내 생각과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런 답답함이 단순히 나의 생각과 달라서 느끼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축복일 수 있다. 답답함을 버티다 버티다 끝끝내 못 버티겠다면 내 생각을 바꾸기만 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테니 말이다. 내 생각을 바꾸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답답함을 해소할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 답답함이라는 것의 실체가 단순히 나의 생각과 달라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어 명확한 답을 알 수가 없을 때 더욱 무섭고 암담하게 다가온다.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내기 힘든 어떤 고난과 역경을 마주하게 될 때 사람은 의지할 곳을 찾는다. 우리는 의지할 대상으로 종교나 멘토, 책이나 명상 등에 의지하며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무언가로부터 답을 찾기 위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쏟아붓는다.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를 얻으며 끝없는 재방송으로 그 인기를 가늠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조작방송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붙기도 했으나 프로그램의 초반에는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짐을 짊어진 개인들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거나 해결방법을 찾기 위한 역할을 어느 정도는 해주었다고도 생각한다.


안녕하세요 이외에도 사람들이 개인의 힘듦을 드러내며 치유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힐링캠프나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며 그 흐름은 최근의 무엇이든 물어보살과 아이 컨텍트로 이어지고 있다.


개인의 고통이 나날이 커져가고, 그것을 표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지고 있는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치유의 방식을 제시해줄 다양한 엔터테이너적 기질을 갖춘 멘토들이 미디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때때로 김창옥이나 김제동처럼 따뜻한 눈빛과 말을 건네며 위로를 전하기도 하고 강신주나 김미경처럼 호되게 꾸짖으며 정신 차리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해가 뜨고 지듯이 미디어에 노출되는 멘토들의 유명세 역시도 올라갔다 내려가기 마련이다.


누구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어떤 종교의 힘에 의지하건 결국 나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만 한다.

외부에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정답이 되어줄 순 없다.


백인이 흑인 차별 철폐를 외치고, 귀족이 신분제 폐지를 주장하기는 힘들듯,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들은 다른 누군가가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다. 이타심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인간은 본래 자신의 일 이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해방은 스스로 쟁취해내야 하는, 어쩌면 일생을 건 도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나의 세상을 자유롭게 하고 전한 나의 삶을 완성시켜줄 마지막 퍼즐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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