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웃음을 치며 들어오는 정지우를 보자 놀라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기억하는 내 입장에선 좋아했던 배우의 리즈 시절을 눈앞에서 보니 입이 떡 벌어질 수 밖에.
심실장이 그런 날 보며 큭큭거렸다.
“여기 상사병 환자 추가요.”
대표실로 들어가는 정지우의 뒷모습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진짜 잘생겼네요.” 라고 나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심실장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래요. 물리지 않게 조심해야 된다던데.”
“에이, 설마...”
이때 현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얼른 자리로 뛰어가 일하는 척 했다. 그녀가 홍보실 안으로 들어서자 매일 뿌리는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회사를 나간 후에도 이 향수 냄새를 맡으면 항상 현팀장 생각이 났었는데.
“진미래, 잠깐만.”
아침부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현팀장이 날 부르자 긴장됐다.
“어제 신문사에 기사는 다 돌렸지?”
“네.”
“너 오PD님한테 왜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
“저도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죠. 근데 무슨 기준으로 <더 키친> 시나리오를 자기가 까냐고요? 흥행할 영화가 될 건데.”
“너는, 너는 무슨 기준으로 흥행한다는 건데?”
미래에서 와서 알아요, 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았다.
“발칙하고 재밌잖아요. 한국 영화에서 보지 못한 소재고, 예산도 높지 않아서 리스크도 적어요.”
“오PD는 <자객>에 꽂혀있어서 그런 거야.”
“<자객> 찍으면 망해요! 한중 합작이 얼마나 리스크가 큰 건데,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오PD지....”
“넌 시야가 좁아서 그래. 액션 영화 대가인 변수성 감독이 찍을 거고, 중국 무협 액션 전문 회사 합작에 주연이 정지우야. 이게 어떻게 망하냐고.”
“겉만 번지르르한 거죠. 제일 중요한 건 시나리오잖아요. 주인공의 감정에 팀장님은 몰입이 되요?”
“왜...”
“왜 몰입이 안 돼요?”
현팀장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흥미로운 것 같기도 한 표정의 정지우가 서 있었는데!
“그, 그게, 왜냐면...”
나는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은 채 버벅거렸다.
“대답 안 하면 대표님한테 이를 거예요!”
정지우는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난 당황한 나머지 솔직하게 내뱉고 말았다.
“주인공 자객이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것처럼 보여요!”
“네에?”
황당한 듯 날 바라보는 정지우. ‘분노 조절 장애’가 이때엔 없었던 말인가? 혼란스러움과 당황함을 숨기려다보니 오히려 센 척하게 됐다.
“상대 자객 집단을 모조리 쓸어버릴 정도의 분노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죠.”
“액션 볼거리가 풍부한데 관객들이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있을까요?”
“죄송한데 시나리오 보는 눈이 없으신 거 아녜요?”
헉! 경악한 현팀장의 눈이 커졌다. 쟤가 요즘에 일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가 심한 가? 아님 미친 건가?
나도 놀라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지우의 눈이 날 똑바로 쏘아 보고 있었으므로.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입이 뇌의 통제를 벗어난 듯 제 맘대로 움직였다.
“하아, 장대표님 회사 굉장하네. 이름이 뭐예요?”
“지, 진...미래요.”
“알았어. 잘 기억해 두죠.”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리는 정지우의 뒷모습을 울상이 된 채 바라봤다. 이게 아닌데? 상상했던 ‘최애’와의 만남은 이게 아닌데... 오빠 너무 멋있어요! 짝짝짝... 하면 날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봐 주는 그런 그림이었는데?
“하... 되는 일이 없냐...”
현팀장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날 답이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쩌죠...?”
“어쩌긴. 정지우가 하는 영화 홍보는 앞으로 맡기지 않을게.”
아, 망했다...
*
중년 감독이 한숨을 쉬며 홍민호 조감독의 맞은편 카페 의자에 앉았다. 카페에서는 ‘부활’의 ‘네버엔딩스토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년 감독은 담배를 물었다가 지겨운지 다시 담뱃갑 안에 넣는데.
“안될 거 같아. 장대표가 꼼짝을 안 해.”
기대한 표정으로 중년 감독을 바라보는 홍민호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홍보팀 미래씨는 시나리오 재밌다던데...”
“야, 홍보팀 막내가 좋다고 하면 뭐해? 오PD가 좋다고 하면 모를까.”
답답한 얼굴로 홍민호를 쳐다보던 중년 감독이
“다른 거 써놓은 건 없어?”
라고 묻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홍민호.
“너도 참... 공대 잘 다니다가 뭐에 미쳐갖고 영화판에 왔냐 그래... 취직이나 할 것이지.”
타박하는 듯한 중년 감독의 말에 홍민호의 어깨가 더욱 처진다.
“늦은 나이에 영화 하기로 결심해서 영화 아카데미까지 입학했잖아요. 감독님 연출부 생활 몇 년 하는 동안 제 나이가 벌써 20대 후반인데, 입봉은 커녕 시나리오 쓴 것도 영화화가 안 되냐고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중년 감독이
“나도 고비야. 장대표만 믿고 있다간 타이타닉처럼 침몰하게 생겼다고.”
‘어쩌죠?“
”다른 영화사를 알아봐야겠어.“
결심한 듯 말하는 중년 감독의 말에 당황하는 홍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