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였으면 좋았을 텐데

ㅡ회사에서 존버하기

by 선홍


점심시간, 글 쓰려고 카페에 왔더니 커피 타임을 즐기는 직장인들로 시끌시끌하다.


카페에서의 후식 타임은 회사 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 아니겠어. 동료들과 나누는 상사에 대한 험담이나 집안 얘기, 회사에 떠도는 정보 교류는 회사생활에 중요한 활력소니까.

상사의 기분변화 원인 분석, 동료와의 실적 비교, 누가 누구랑 사귄다 카더라 등등... 그게 다 뭐라고 그리 열심히 들었었는지. 그때는 살아있는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일일드라마의 ‘김치 싸대기’ 장면보다 더욱 흥미로웠더랬지.


특히 중요한 것은 회사의 실적 분석에 따른 인사이동, 팀 개편 같은 소문이었어. 아무래도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십여 년도 전에 대기업에서 내가 다니던 영화사를 비롯,회사를 합병했던 적이 있어.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서로 간의 경쟁도 치열했는데, 실적이 좋지 않자 인력을 축소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 TF(task force) 팀이 꾸려졌고, 팀장이었던 엄마는 팀을 대표해 혼자 참석해야 했어.


참석해서 하는 일이 이런저런 포장을 걷어내고 보면 결국엔 내 팀이 이 회사의 실적에 도움이 된다, 상대 팀은 도움이 안 된다,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었어. 직장생활의 비정한 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참석한 사람 중에 가장 씁쓸한 사람이 엄마였다는 사실이었어. 싸우는 상대팀이 내 첫 직장의 상사들이었거든. 그 영화사를 다니려고 대학을 다니던 와중에 서울로 상경했던 나는 어리바리, 어리숙의 절정체로 민폐 신입사원이 되지 않기 위해 죽어라고 뛰어다녔지만 자주 혼이 났었어.


홍보마케팅 부서다 보니 ‘라떼’는 신문사가 중요한 홍보수단이었고, 직접 돌아다니면서 소스를 뿌려야 했지만 지하철로 무슨 역에 내려야 하는지도 몰랐거든. 하하.

지금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선임은 답답해 짜증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했어. 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어 미워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정이 많이 들어버렸지.

아무튼 다행히 TF팀에 내 선임은 없었지만 첫 직장에서 다른 부서의 윗사람으로 만나 편하게 장난치던 분들을 상대로 살벌한 논쟁을 벌이게 된 상황이 기가 막혔어.

그 시절 혼나도 기죽지 않고 사투리 억양으로 떠들어대는 신입사원을 귀엽게 봐주면서 ‘저거 언제 인간 될까...’ 생각들 해주셨을 텐데. 옛날 선배들을 차갑게 상대하다 보니 속에서는 뜨거운 뭔가가 울컥 올라왔어.

너무 감정적이라고? 아, 정말 사이코패스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 순간에 결심했던 것 같아,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세상의 쓴맛을 아직 제대로 못 봐서 그런지 그 순간의 비정함이 가슴에 박혀버렸어. 회사라는 것에 만정이 떨어져 버렸달까. 자유로운 성향이다 보니 언젠가 프리랜서의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느끼고는 있었지만 확실한 계기를 심어준 셈이었지.

회사에서 출세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감정 따위는 넣어둬. 사이코패스 성향이라면 출세할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타고난 성향이 그게 아니라면 스트레스가 클 테니 해방구를 만들어 두길 바란다.

앞서 얘기했던 대로 ‘덕질’이든 뭐가 됐든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 탈출구로 삼을 수도 있고, 그 세계를 기반으로 다른 꿈을 꿀 수도 있잖아.

아니면 마음 맞는 동료와의 우정도 버티는데 큰 힘이 된다. 동병상련의 일을 겪게 될 테니 관계를 소중히 하길 바래.

허나 회사에서 만난 우정은 그만두게 되면 그 힘이 점점 떨어지더라. 회사라는 전쟁터에서는 전우처럼 끈끈하지만 회사가 사라지는 순간 동력도 사라져 버리는 느낌. 연락하기도 어색해져서 당황했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니 지나친 기대는 하지 말자.

갓 성인이 된 너에게 너무 비정한 얘기만 늘어놓은 것 같다. 사실 그런 순간들보다 회사에서 성취감을 느끼면서 즐겁게 일한 기억이 더 많아. 매일 해도 티도 안 나는 집안일보다는 노력하면 인정받는 회사일이 더 잘 맞았거든.

너도 나중에 경험한 어떤 얘기들을 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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