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고통을 겪고도 또 같은 선택을 한다더라. 한마디로 ‘바보 아냐?’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지는 순간들의 연속.
회사 다니는 일에 정나미 떨어지는 것 중 하나가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이겠다. 30대 때 임신 후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이끌고 회사 다니느라 충무로로 혹은 역삼역으로 1시간 넘는 거리를 매일 왔다 갔다 거렸어. 지옥철에서 사람들 사이에 꽉 껴 있으면 손잡이 안 잡아도 되는 거 알지?
임신 초기에는 너무 힘들어 노약자 석에 앉았다가 겉으로 티가 안 나는 바람에 젊은 여자가 여기 앉았다고 욕하는 할아버지를 만나기도 했고.
그땐 여행하는 걸로 생각하자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야 뱃속의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테니까.
어른들이 조언하길 애가 뱃속에 있을 때가 그나마 편하다고 했는데, 네가 태어나니까 알겠더라.
일단 산통은 드라마에서 애 낳는 장면이 나올 때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는 그런 표현으론 부족할 만큼 아팠어. 누군가가 골반뼈를 마구잡이로 잡아 늘이는 느낌?
그런 걸 겪고도 잊어버리고 또 아이를 낳았으니 ‘바보 아냐?’라고 할 만하지 않겠니.
의사 선생님이 갓 태어난 너를 내 어깨쯤에 올려줬을 때의 따뜻한 온기가 지금도 떠오른다. 한 손으로 쥐면 바스러질 것 같아 어쩔 줄 모르던 그때. 넌 그냥 감동이었어.
네가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나서야 모유 주는 법도 모르고, 기저귀 채우는 법, 분유 타는 법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어. 매일이 당황의 연속.
하긴 뭐 회사 다니느라 바빠서 애 낳을 때 하는 ‘라마즈 호흡법’ 같은 것도 몰랐으니 출산하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얼마나 당황했겠니? 호흡법이라도 알면 출산의 고통과 두려움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니 꼭 알아두길 바란다.
진짜 어려움은 시작되지도 않은 거였지. 너무 아는 게 없는 초보 엄마라 널 씻기고, 먹이고, 툭하면 아파 병원에 데려갈 때마다 잘못될 까 봐 싶어 엄청 긴장했었어. ‘라떼’는 스마트 폰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두꺼운 ‘삐뽀삐뽀 119 소아과’ 같은 책에 매달려야 했었지.
회사에 복귀하기 위해 태어난 지 3개월 정도밖에 안 되는 너를 할머니에게 맡길 때는 엄청난 ‘분리불안’도 느꼈었어. 아기인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품 안의 아이를 떼놓고 회사에 나가다 보니 매일이 보고 싶고, 불안하고,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어서 울고.
회사가 모유 유축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보니 분유로 갈아타는 훈련을 할 때 네가 심한 알레르기로 토하는 등 고생하는 걸 보고 미안해서 또 펑펑 울었어. 진짜 엄마 되기 힘들다, 그렇지?
워킹맘이 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보다 응축된 시간을 살아야 해. 친구와의 만남은 사치였던 터라 못 만나다 보니 엄마는 이제 친구가 별로 없다. 다 내 가족을 이루기 위한 대가 아니겠니?
자투리 시간을 우선 잘 활용해봐. 결혼 안 한 직원들과 경쟁하고 성과를 내야 하니 남들처럼 수다 떨고, 주말에 쉬면서 버티긴 어려워. 회사일이란 게 뭐 즐거워 죽을 무엇은 아니지만 최대한 적성에 맞는 부서를 찾아다녔었다면 자투리 시간에도 집중할 수 있어.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마저도 쉽지 않겠지.
평일에는 애를 봐주고 반찬 정도는 해줄 아내가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돈으로 사람을 구하든, 부모님에게 부탁드리든, 믿을 만한 아내 같은 존재가 있다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데, 엄마는 그런 면에선 네 할머니가 계셔서 행운이었어.
워킹맘일수록 회사를 다니는 목적도 뚜렷해야 돼.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되는데 회사를 다니는 목적이 희미하다면 버틸 수가 없으니까. 쥐꼬리 만한 월급은 애 양육비로 다 들어갈 테고, 내가 일을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일을 더 많이 하고, 인정받는 상황도 생길 테니 말이야.
엄마는 살림보다 일이 좋았거든. ‘안사람’보다 ‘바깥양반’ 스타일. 내가 어떻게 생겨먹은 그릇인지, 어디서 즐거움을 얻는 인간인지는 알아야겠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꼭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지켜내려고 노력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더라고.
반백 살이 된 지금, 한 주먹 만하던 아기가 이제 나보다 똑똑해지고 몸도 커졌구나.
지난 고생을 다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 아이 안 낳으려는 세태가 누구보다 이해되지만 갱년기를 맞을 나이가 되고 보니 집에 황금으로 만든 말뚝이라도 세워놓은 것처럼 네가 있어 든든해.
그런데 말이야, 진짜 어려움에 대해선 아직 시작도 안 한 것 같으네.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다음에 얘기하자,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