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신나게 걷기 운동을 하던 순간이었다.
헉헉헉, 따뜻한 콧김이 얼음 같은 대기를 만나 얼굴에 고드름이 열리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드는 순간, 듣고 있는 음악을 바꾸려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는 그런 평범한 순간.
추위에 굳어버린 손가락은 스마트폰을 스치는 인연이라도 되는 양 무심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안돼에--!!"
땅바닥에 무참히 추락한 스마트폰은 하필이면 얼굴 정면을 시멘트바닥에 박고 만 것이다. 순간 얼음이 되었다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 입에서 한국인의 얼에 살아 숨 쉬는 육두문자가 새어 나왔다.
스마트폰이 살아있길 간절히 바랐건만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홱 뒤집자 '오 마이 갓' 액정이 산산이 부서져있었다! 커다란 금, 작은 금, 자글자글한 금 등으로 성한 데가 거의 없었다.
나는 '괘 괜찮아, 넌 살 수 있어'라고 위로하며 이 버튼 저 버튼을 이리저리 눌러댔다. 그러자 스마트폰은 마지막 숨을 내뱉듯, 유언을 남기듯 반짝 평소의 화면을 보여주더니 꼬로록 어둠 속으로 영원히 잠겨버리고 말았는데. '안녕...'
나는 비통함에 잠겨 스마트폰을 마구 흔들어댔지만 묵묵부답 살아올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오호통재라... 당장 집에 돌아가면 봐야 할 유튜브 동영상, 인스타그램에 사진 업로드, 브런치에 좋아요가 늘었는지 말았는지, 문자, 이메일 확인 등등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게 해 주던 절친이 눈앞에서 죽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남편, 자식보다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던 스마트폰은 이제 내게 단순 사물이 아니었다.
영화 'HER'의 A.I '사만다'를 주인공이 진심 사랑하게 된 것처럼 스마트폰은 내게 누구보다 똑똑한 지능을 가진 비서이자 친구였다.
내일 해 뜨자마자 일착순으로 병원, 아 아니 서비스센터를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방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할 일이 없음을 깨달았다. 밤에 자기 전까지 스마트폰 하다가 각성된 상태로 억지 잠을 청하곤 했었으니까.
스마트폰과 친해진 후로 TV시청, 야간 독서랑은 멀어진 지 오래였는데.
'휴우...'
평소 스마트폰으로 잠 오는 영상을 틀어놓고 잤었는데 어찌 잠들지, 알람도 없어져 어찌 깰지도 걱정이었다.
눈 뜨자마자부터 잠들 때까지 스마트폰은 내 생활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어보면 기술자들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오래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실에 기분이 엄청 나빠져 스마트폰과 거리두기 해야지 결심했지만 오래가질 못했었다.
불편함은 바로 시작되었다.
책상에서 이미 애물단지가 돼버린 탁상시계를 찾느라 서랍을 다 뒤진 후 건전지까지 찾아 끼우느라 야단이었다.
다음날에도 계속 불편함이 이어졌다. 낯선 서비스센터를 찾아가는 길 검색하려고 노트북을 펼치는 귀찮음에 이어 약도를 종이에 그려야 했다.
무려 종이 약도라니! 몇 백 년 전에나 그러지 않았나 싶게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뿐 아니라 'X카오맵'이 없으니 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춰 나갈 수가 없어 십분 넘게 추운 길에서 기다려야 했다.
버스 안에서도 만지작거릴 게 없어 심심한 건 당연지사.
긴장한 채 서비스센터에 도착하자 불안이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액정 수리비가 30만 원이 넘는다는 사실!
이참에 그냥 신형으로 바꾸자 결정하는데 피눈물이 흘렀다.
병원비, 아아니 구매비용이 100만 원이 넘는 데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이 너무 많아 다운로드하는 시간이 3시간이 넘을 거라는 진단이었다. 사진은 많이 찍지만 정리하지 않는 나란 인간, 새 스마트폰 사는 걸 이래서 싫어하는데.
카페에서 기다릴 걸 예상해 평소처럼 책과 다이어리를 챙겨 왔기에 투덜대며 하던 대로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했다.
뭐랄까, 세상이 전보다 고요해진 기분?
평화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안 받아도 되고. 급하게 답해야 할 문자도 없었다. 집중을 깨뜨릴 인스타그램, 자극적인 뉴스도 없었다.
할 일에 집중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구경했다. 음악도 못 들으니까 딱히 할 일도 없었다. 평소에 눈과 귀를 막고 살다가 열린 기분이 들었다.
시간은 그렇게 천천히 또박또박 흘러갔는데.
버스시간 확인하지 않고 기다리는 기분도 점차 괜찮아졌다. 몇 분 더 기다리는 게 뭐 대수라고.
버스 안에서는 바깥 풍경을 오래 감상했다.
생각해 보니 스마트폰 알람대신 똑딱똑딱 탁상시계 초침소리에 어젯밤 잠도 스르르 들었던 것 같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산 세월이 더 길었는데 언제부터 스마트폰에 이토록 중독되고 만 것일까.
덕분에 편리해진 건 사실이지만 내가 사물의 주인인 줄 알았다가 노예임을 깨닫는 건 기분 나쁜 일이다.
이후 나는 끊었던 야간 독서를 다시 시작했다.
도파민 중독임을 인정하고 대신 재밌는 책을 읽기로.
스마트폰 때문에 집중력이 짧아진 뇌로 이미 바뀌어 버렸는지 쉽진 않았지만 독서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스마트폰 사망사건으로 인해 내 도파민중독이 얼마나 심각한지, 스마트폰과 거리 두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