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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죽음의 위기를 느껴본 적 있나요

by 선홍


매일 혼자 카페를 가는 사람으로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SNS에서 너무 유행하지 않는 곳, 원목가구나 책으로 꾸며진 아늑한 분위기 외에도 화장실이 어떤가 하는 점이 다시 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key가 되더라고요.


서울의 식당이나 카페는 화장실이 외부에 있는 경우가 많아 화장실이 내부에 있으면 일단 점수를 먹고 들어가지요.


압구정의 유명한 베이커리 카페에 친구랑 갔던 적이 있어요. 눈이 뒤집힐 정도로 맛있는 빵과 여유로운 좌석에 잘 왔다, 손뼉을 쳤었죠.

문제는 때가 추운 겨울이었는데, 외부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가 못 돌아올 뻔했어요. 너무 멀어서.


엉뚱한 건물에 들어가 헤매면서 호텔급 화장실이라도 안 나오면 두고 봐라, 의 심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찾아낸 오래된 건물의 화장실은 실망하기에 충분했고, 그 카페에 다시 갈 마음이 들지 않았죠.


또 여대 앞에 있는 카페 사장님이 잘 생겼다고 하여 갔던 적이 있습니다. 왜요, 저도 눈이 즐거울 수 있잖아요.

소문만큼 잘 생기셨고, 카페 인테리어도 모던했고 다 좋았는데 문제는 화장실이었죠.


외부에 있는 건물은 웨이팅 중이던 귀신한테 빙의되기 딱 좋을 만큼 음산했어요.

거기에 몸을 구겨 넣어야 될 만큼 작고 지저분한 화장실의 수압은 얼마나 낮은지 졸졸졸 시냇물인 줄.


프로불편러는 아니지만 화장실로 공포소설 한 편도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삼청동의 세련된 한옥개조 레스토랑에 거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을 때는 화장실에서 죽음의 위기를 느꼈습니다.


변기에 앉으려면 앞에 폭이 없어 벌받는 것처럼 '무릎 구기다 시피' 자세를 취해야 했죠.

오른쪽 공간은 쓸데없이 넓은 게 기이했고, 더욱 이상한 것은 앉는 순간 벽에 매달린 포크가 눈을 찌를듯한 각도로 달려있는 게 아닙니까.


뭐지? 똑바로 못 싸면 눈알 찔러버린다는 경고인가? 후들후들 화장실을 나온 후 다시는 그 레스토랑에 안 갑니다.


화장실이 다 좋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기분 좋게 즐기러 간 공간의 완성은 화장실이고,

바로크, 로코코풍의 인테리어를 바라는 게 아니라 평범하기라도 해야 하지 않나요.

트렌디한 화장법으로 완벽하게 꾸민 미인이 팬티가 적나라하게 바치는 바지를 입은 것처럼 민망합니다.


도쿄 여행할 때 제 눈에 신기했던 점은 아무리 코딱지만 한 식당, 카페라도 코딱지만 한 화장실이 내부에 있었던 점이었어요.

숨겨진 공간을 파내는 재주라도 있는 것인지 안에 들어가면 자동변기에 세면대까지 갖춰져 있었습니다.

물론 코 앞에 화장실이 있는 자리에서 먹는 게 편하진 않아도 뭐, 깨끗하니까요.


유튜버 '밀라논나'의 영상을 보다가 고급스러움을 논할 때 화장실과 생화의 중요성을 언급하시더라고요.

그렇죠! 제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카페 테이블 위에 한 송이 꽃이 꽂혀있어 아이 좋아, 했다가 조화인 걸 알고 차게 식어버린 적이 있어요.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왜 조화를 놓아 자리를 좁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말라비틀어져도 생화였으면 좋은 그림 모델이 됐을 텐데 말이죠.


혹시 나도 그런 사람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남 앞에 잘 차려입고 기분 좋은 화술로 떠들면서 부정적 생각을 일삼는 건 아닌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인테리어 별거 없네. 했는데 깨끗하고 환한 화장실에 감동해 단골이 되는 것처럼 내실 있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드로잉일기
<북살롱텍스트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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