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경쟁사회와 ‘3등의 정신’
아들에게 전해주는 투자 레터 (2)
밤길을 걷다 보니 상가 건물 간판들이 빽빽하게 모인 채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었다. 주택가가 밀집되어 있다 보니 학원가들도 따라 즐비해 있는데 이 중 유난히 영재교육기관 간판이 눈에 띄었다. 다 같은 학원이 아닌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학원, 코어 중의 코어 슬로건을 내세워 희소성의 특별함을 추구하는 학부모들의 욕구를 사로잡을 것이다.
영재 학원, 영어 유치원 등은 일반 학원에 비해 비용이 매우 비싸지만 그만큼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학원과의 차별성을 보여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점에선 좀 더 다양하고 심도 있는 학습과 경험이 가능한 곳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바라는 그 심도 있는 학습뿐만 아니라 심도 있는 경쟁(?)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이에 비해 꼭 필요한 경험인지는 모르겠다.
경쟁... 살아가면서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들과 얽혀 살 수밖에 없기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타인과 동일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서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기 시작하고 한번 시작되면 내가 별도의 깨우침이 있지 않은 이상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지독한 관성이다.
영재교육기관과 같이 더 우수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일수록 타인 간의 경쟁도 더 치열해진다. 아이들 간 경쟁뿐만 아니라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인 긴장이 뒤따른다. 그렇게 교육받아오고 반복될수록 더 굳어지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나의 에너지가 따라주지 못하면 지쳐 나가떨어지거나 번아웃이 오거나 갑자기 자아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경쟁의 본질이 스스로와의 경쟁이 아닌, 나를 타인과 비교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쟁이기 때문이다.
영재교육기관에서 심도 있는 학습을 시키되 심도 있는 타인과의 경쟁은 가급적 피하도록 가르쳐야겠다. 내 경쟁 상대를 내 주변을 둘러싼 우수한 영재들이 아닌 과거의 나로 새롭게 세팅해줄 필요가 있다.
우선 남과 비교해 뒤처질 까봐 생길 수 있는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남이 나아가는 속도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내 속도에 대한 조급함도 내려놓을 수 있다.
불안함과 조급함만 어느 정도 내려놓아도 경쟁사회를 살아가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 또한 경쟁상대가 타인이 아닌 과거의 나로 세팅이 되면 상방이 열려 있으므로 한계 없는 도전도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보다는 열등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전할 여지가 더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예 눈과 귀를 닫고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채 과거의 나만 바라보며 살아가기란 참으로 힘들다. 어른도 엄청난 마인드 컨트롤을 요하는데 아이는 오죽할까.
경쟁 사회를 살다 보면 1등, 2등과 같이 등수가 붙게 되는데 나는 3등의 가치를 가르쳐주고 싶다.
1등은 본인 위치를 빼앗길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고 2등에게 쫓기게 되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는 포지션이다. 그리고 2등은 1등을 쫓아가느라 그것은 그것대로 조급해 보인다.
3등은 1등과 2등의 불안함과 조급함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상당히 상위권에 있는 포지션이다. 즉 눈에 아주 띄지는 않으면서도 실속을 챙겨갈 수 있는 포지션이다.
그렇다. 이것이 중요하다. 눈에 크게 띄지 않으면서 실속은 챙긴다.
경쟁사회에서 눈에 지나치게 띄는 것은 득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실이 더 많다. 사람의 마음은 일반적으로 이타적이기보다 이기적인 본성으로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본성을 바탕으로 생기는 타인에 대한 부러움, 시기심과 질투심이 경쟁사회에서는 빠질 수 없는 구성요소다. 시기 질투가 존재하고 있는 이상 눈에 띄는 것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으면서 상위 포지션에 위치한 3등은 상대적으로 밸런스가 맞춰져 있는 안정적인 등수다. 난 아들에게 ‘3등의 정신’을 강조하고 싶다.
3등의 정신에는 자랑이 없다. 말이 많지 않다. 입보다는 귀를 연다. 개방적인 마인드를 탑재한 채 모두 학습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1등과 2등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받들어주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한다. 그 스포트라이트에는 축하도 있겠지만 시기와 질투도 섞여 있을지 모를 일이다. 3등은 1,2등이 맞게 될 이 정체 모를 비바람에 일일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능력의 한계치로 3등에 겨우 도달하는 것이 아닌, 1,2등의 공간을 남겨둔 채 일부러 3등이 되어주는 경험을 해보자. 내가 당당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이 높은 상태라면 기꺼이 3등의 정신을 계승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아버지가 아들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