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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 snail Sep 01. 2023

된장국과 레오타드

뚝배기 효과가 있는  하이얀 코렐 냄비에 물을 받는다.

냄비의 3분의 2를 채운 물이 보글보글 끓으면 멸치 한 주먹을  넣어  다시물을 우려낸다.

깊은 맛 나는 시골 된장 한 스푼을 거름망으로 잘 눌러 된장 국물을 낸 다음 다진 마늘 한 스푼과 깨끗하게 씻어 두었던 얼갈이배추 한 주먹을 쫑쫑 썰어 끓는 물에 넣어 한소끔 끓인다.

마지막으로 싱싱한 대파 한 자루를 자디 잘게 다져 넣으면 얼갈이배추 된장국이 완성된다.


아, 잠깐잠깐!!

2프로가 부족하다.

쇠고기 다시다 한 작은 술 추가.

캬~ 이맛이지, 이맛이 고향의 맛이지.


7시 30분,

"아침은 뭐야?"

"배추된장국"

"아 진짜, 아침에 된장국 먹으면 냄새난단 말이야."

"양치하는데 냄새가 왜 나?"

"양치해도 목에서 냄새가 올라온다고, 집에 가글 없지?"


생전 사용하지도 않는 가글 타령이다.

안다. 대화의 요는 메뉴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끈 화가 치받아 오르지만 '흐흠... 흑' 들숨에 삼켜버린다.


"매번 고기반찬만 어떻게 먹냐?"

'오늘 먹은 음식이 10년 뒤 내 건강'이라는 신념을 가진 나로서는

잦은 배달음식과 밀키트에 의존하는 식단에서 이 마지노선만큼은 양보해 줄 수 없다.

" 오늘 먹은 음식이 십 녀...'"

"아, 알았어 먹는다고~~"

훈계가 듣기 싫은 아이는 말도 시작하기 전에 원천 봉쇄해 버린다.

'흐흠... 흡' 들숨으로 올라오는 그 무엇을 삼킨다.


7시 40분.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자디잘게 다진 얼갈이배추를 된장국에서 기가 막히게 분리해 남겨놓는다.

일명 '혼합물 분리'의 달인들답다.

밥에 들어간 콩 골라내기. 야채햄볶음밥 속 야채 골라내기 등등.

분리의 실력이 향상하는 만큼 다지기의 실력도 만만치 않게 동반 성장한다.

그럼에도 부분 분리는 계속된다.

'진짜 너무하네'


7시 55분.

양치를 끝내고 버스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기 전 아이가 검은 레오타드를 슬며시 꺼내 놓는다.

"엄마~, 이거 저녁에 입을 건데 좀 빨아줘~."

애교가 살짝 들어가 있다. 힘의 무게가 나에게로 온다. 들숨에 마셨던 숨을 목소리에 실어 토해낸다.

"아니, 저녁에 입을 거면 최소한 하루 전에는 내줘야지. 비도 오는데 오늘 못 빨아. 그냥 하루 더 입고 빨아!"

땀을 많이 흘려서 못 입겠다며 막무가내로 던져놓고 간다.

절대 못 빤다고 엄포를 놓는 내게 현관에서 사라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뭐든 안 되는 이유보다 되는 이유부터 찾으라며. 건조기 못 넣으면 제습기에 말리면 되잖아."


헉, 한대 훅 치고 들어온다.

지금까지의 삶은 그리 치열하지 못했다. 되는대로 살아온 삶이다.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자기 계발서며 동기부여를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즉 체화되지 않은 학습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대한민국에서 의미하는 '성공하는 삶'에 지식들을 아이들에게 남발한다. 뭐 하면 된다는 그런 종류의 말들.


완벽하게 체화되지 못한 말들의 조각이 비수가 되어 날아온다.

수학문제가 안 풀려 낑낑대는 아이에게,

수행이 어렵다고 구시렁구시렁 불만을 토해내는 아이에게 던졌던 이론서의 말들.

"안 되는 이유 말고, 되는 이유 좀 찾으면 안 돼?"

내 삶을 관통하지 못한 겉돌던 지혜의 말이 되돌아온다.


훅 던져진 땀에 절은 레오타드를 들고 급속코스로 세탁을 한다. 되는 이유가 많았지만 품이 들어가고 귀찮다는 이유로 쉽게 안된다고 말해버린 내 행동들을 돌아가는 세탁기에 넣어 빨아버린다.


안 되는 이유 말고, 되는 이유를 몸으로 찾는다.

동기부여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거였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 앞에 앉아 있는 내 빰이 살짝 화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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