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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 snail Oct 23. 2023

피라칸타의 숲

사랑을 품은 숲

생활 자전거를 타고 10km를 달리는 것은 어림잡아 로드 자전거로 20~30km를 달리는 것과 같은 효과일 듯싶다.

10월 어느 오후, 자전거를 타고 나선다.

근 한 달여만의 자전거 타기는 고작 몇 번의 페달밟기에도 숨이 차오르고 허벅지가 뻐근해진다.

악착같이 속도를 내볼 마음도 없이 천천히 굴러가는 자전거뒤를 따르는 남편을 먼저 보낸다.

그에게는 운동이 필요하고, 나는 멈추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코스로 가는 것이 필요하다.


8월보다 헐빈해진 길을 달린다.

뜨겁던 태양아래 꽉꽉 차고 넘쳤던 초록의 더미들이 한결 부드러워진 가을빛에 헐빈해져 간다.

뒤따르는 남편도 없겠다 자전거 속도도 헐렁해진다.


지난겨울이 가고 봄볕이 차오를 때, 이 길뿐 아니라 나서는 족족 스마트폰 카메라 버튼을 시도 때도 없이 눌렀는데,

이상한 점은 이 가을 변화의 길목에서 카메를 쉬 꺼내 들지 않다는 것이다.


차오름과 사그라듬.

나의 에너지도 계절의 기운을 닮아가는가 보다.


헐빈해질수록 제 원형의 모습을 드러내는 길목과 초목들.

많은 생각들을 채우고 사그라뜨리며, 밟아대는 페달과 함께 생각의 원형에 다다르고 '겸손'이라는 단어만 마음에 덩그러니 남긴다.


무더기로 번식한 달뿌리풀,

나무둥치에 무슨 전설이라도 품은 듯 제 몸을 비틀어 자라는 왕버들나무의 구간을 지난다.


오후 5시, 끝자락에 걸린 느슨해진 해가 편만하게 퍼지는 그곳에 피라칸타의 숲이 펼쳐져 있었다.

둥글둥글하게 잘 손질된 커다란 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손톱보다 조금 큰 타원형의 두꺼운 잎과 편편하게 동글동글한 주황 열매가 기가 막히게 조화롭다.


끼이긱~, 자전거를 세운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렌즈에 담아낸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의 현상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현실 앞에 설 때마다 사진을 배웠어야 했는데라는 아쉬움의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자연은 사진기술의 미흡함을 그대로 어넘는다.


피라칸타는 유럽남부와 아시아가 원산지다.

잎과 열매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으로 조경수로 많이 쓰인다.

어딘가에서 보았었고, 무심히 보았넘겼을 피라칸타를

2023년 10월 어느 날 드디어 나의 나무로 기억한다.

큰 나무와 하얀 좁쌀 같은 꽃으로 봄에도 제법 아름다웠을 나무였을 것이다.

'알알이 영근 사랑'이라는 꽃말에 어울리게 주황의 열매들이 사랑의 조각들 마냥 사랑스럽다.

파아랗게 높은 가을 하늘과 흰구름을 배경으로 동그마니 줄지어선 피라칸타의 숲 속에서 행복한 순간을 맞는다.



피라칸타로 인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고,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행복 한 가닥을 찾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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