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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를 즐기는 남자와 태고를 꿈꾸는 여자

by slow snail

문인 이규보는 시금주(詩琴酒)가 병통이라고 했다.

병통이란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이 병통이다.

나에게는 산이 병통이다.

전국 명산대천을 탐해서가 아니다.

산을 찾는 일이 뜸해질 때면 슬슬 증상이 나타난다.

고구마를 급하게 먹어 목에서 천천히 넘어갈 때 느끼는 체증이 나타나고,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마치 배가 살살 아프면서 시원한 변을 보지 못할 때의 께끄름함.

짜증이 늘고 말이 날카로워진다.

일의 개요를 잡지 못하고 흐물거린다.

기승전 일상생활 불가다.


같은 산도 매일 다른 시간에 오르고 싶다.

아침의 산과 점심의 산, 해거름 녘의 산과.... 깊은 밤의 산도 궁금해진다. 비록 내가 갈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지만 나는 매일 시시각각의 산을 상상하고 그 속에 나를 두고 산의 냄새와 풍경을 그려본다.


주말을 보낸 아침, 마음이 급해졌다.

평소에 걷던 시간보다 담은 30분이라도 앞당긴 이른 시간의 산을 걷고 싶었다.

휴일의 지푸둥 함을 안고 학교를 가야 하는 아침을 맞는 아이의 몸, 담은 30분이라도 늦추고 싶은 마음과 부딪쳤다.

당장 일어나지 않는다면 두고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런 나의 모습이 못마땅했던지, 남편의 핀잔이 날아든다.

아이의 양육이 우선인 사람이 뭐가 더 중요하다고 월요일 아침을 이렇게 몰아가냐는 것이다.

가을아침의 조금 이른 산을 보겠다는 설렘에 찬물을 끼얹은 남편이 미웠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화가 났다. 스포츠카 모임을 즐기는 남편은 어제도 미니 모터쇼를 다녀왔다. 멀쩡한 차를 튜닝한 희한한 사진들이 톡방에 공유되었다. 참말로... 멀쩡한 차를 돈 들여 붙였다 떼었다 뭔 일이람... 일도 공감 안 되는 취미에 메마른 공감인척의 말들을 달아주었다. 그랬는데, 감히 나의 이 작고 소박한 취미를 위해 일이십 분 빨리 움직여 달라는 요구가 처참히 묵살된 사실에 화가 났다.

부부의 날카로운 대화에 아이는 머쓱해졌다.

등교와 출근을 시킨 후, 이미 도로를 쏟아져 나온 차들과 합류하여 천천히 산으로 몰아간다.

화가 났다. 잔뜩 오른 화를 품고 산을 오른다.


가을 아침이다.

공기는 싱그러웠고, 하루가 다르게 낙엽화되어가는 산은 갖가지 낙엽냄새로 후각을 자극했다.

초반구간이 힘든 산행로는 모든 생각을 무로 돌려놓았다.

오직 발걸음과 호흡에만 집중을 한다.

어느 정도 오른 구간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신다.

올라온 길을 되돌아본다.

화가 났던 마음이 있었던가 싶다. 피식 웃음이 난다.

그의 배려 없음에도 한 움큼 웃음으로 대처하게 하는 이런 산을 찾지 않을 수 없음이다.


산길 중간중간 대형 산행모임의 광고판이 보인다.

매일 같은 동네산도 이렇게 좋은데, 소문난 산들을 제철에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하루 정도 시간도 낼 수 없는가 싶은 갑갑증이 밀려왔다. 아침에 남편과 다투던 일에 대한 합당한 속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어진다.


걸음걸음마다, 어지러운 속말들이 이어지고,

눈은 갖가지 가을을 맞이한 잡목들을 잡아낸다.

귀에 익은 까마귀, 딱따구리, 산새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산길 구석구석마다 미세하게 다른 냉기와 습기와 이끼의 냄새들이 이어지는 어지러운 생각들을 하나하나 잡아채간다.


그래, 스피드를 즐기는 그 남자가 이 세미함을 알 리가 없잖아.

내가 그의 스피드를 이해할 수 없듯이

그가 나의 느림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그의 자동차모임에 가끔 동참해 준다. 그럼에도 깊은 기쁨은 없다. 그저 나의 남편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는 왜 그런 종류의 취미를 가지는지 기본적으로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 동행해 준다.

그도 나와 함께 가끔 산길을 걸어준다.

운동도 가끔 필요하고, 새로운 등산길을 처음 가기 두려울 때 그와 함께 사전 답사를 요구할 때 들어주는 것이다.

그는 스피드를 즐길 때 기쁘고.

나는 산길을 걸을 때 기쁘다.

기쁜 순간의 감정들은 어려울 때를 버티게 해 준다.

좀 섭섭하지만 그도 나도 그 시간을 통해 섭섭함을 위로받는다.


병통이지만,

스피도와 느림을 갈구하는 병통이지만 위로가 곁들여진 병통이라 끊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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