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만에 산을 올랐다.
유난히 포근했던 기온으로 늦게까지 늦여름의 옷을 입고 있던 산이, 3주간의 공백동안 서서히 색깔옷을 입어가고 있었다. 성급한 기온 변화로 급히 떨궈낸 나뭇잎은 저무는 제 색을 찾지도 못한 채 말라 떨어져 있었다.
산 오르는 일 말고는 따로 체력을 관리하지 않았기에 공백의 시간을 딛고 위로 뻗은 산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염려도 되었다.
11월의 해는 일찍 떨어진다.
떨어지는 해를 정상에서 보고 싶다며 함께 동행한 아이는 이미 늦어버린 정상에서의 일몰을 포기 못해 다람쥐처럼 쪼르르 올라가기 시작한다.
엄마는 엄마 속도로 갈 테니, 조심해서 먼저 올라가라고 당부해 올려 보내고, 한편 좋기도 했다. 말 그대로 오로지 내 속도와 마음으로 산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느긋한 속도와, 달큼한 낙엽내음이 폐 속을 채워온다.
5시 30분이라는 이른 저녁의 물리적 시간과는 달리,
겨울 초입의 산은 이미 늦은 저녁으로 접어들었다.
무엇을 알리는 신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산사에서 울리는 종이 온 산을 조용히 감싸 안았다.
자박자박 호흡에 맞춰 올라간다.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른다.
느림과 고요가 발밑에 깔렸다.
바람도 없는 산에 후드득후드득 툭툭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한여름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으며 잎맥 하나하나에 빗소리를 기억해 둔 걸까.
낙엽 떨어지는 소리는 비 내리는 숲 속의 소리와 흡사했다.
경이로운 앎이었다.
꽤 긴 시간이 걸렸으나 쉼 없이 올랐다.
중간중간 산 너머로 넘어가는 햇살의 붉은 기운을 보며 또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그 해의 끝자락을 볼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는 15분쯤 먼저 정상에 도착해 있었다.
완벽한 일몰은 아니었으나 아이의 사진에 담긴 붉음은 아름다웠다.
후에 함께 다시 일몰을 보러 오자고 약속을 했다.
나는 아이가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방법론적으로 배우는 경청이 아닌 몸으로 배워가는 경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단 몇 도의 온도로 바뀌는 계절과 그 속을 살면서 느끼는 세미한 감정들을 알아채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편리한 것 가득이다.
편리한 것들은 대부분 간접경험에 속한다.
우리가 본 일몰보다 더 아름답고 완벽한 일몰의 사진들은 스마트폰만 켜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걸음과 일몰의 느낌은 핏줄처럼 아이의 머리와 가슴에 새겨져 앞으로 펼쳐질 아이의 시간 속으로 이어져 멋진 길을 만들어갈 것이다.
삶은 간접경험을 넘어 직접경험으로 이어질 때 주도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교육업계에서 그토록 외치는 자기주도적 학습은 직접경험을 통해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