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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효경 Aug 21. 2022

호들갑스러운 서점지기 후기+횔덜린

호들갑 독일문학

호들갑 독일문학_번외편

 - 30분 서점지기 후기와 횔덜린의 편지들



  집에 도착하니 문고리에 탐스러운 복숭아 3알과 쪽지가 있는 비닐봉투가 걸려있었다. 누가 놔두고 간 것인지 경계했지만 복숭아가 어찌나 탐스러운지… 식욕이 의심을 이기고말았다. 쪽지편지를 꺼내 읽으니 친구 A가 놔두고 간 것이었다. 마음을 놓고 편지를 읽어내려가는데…

 

  ‘OO에게.

안녕? A야. 아직 집에 안왔구나. 너네 집 앞에 쭈그려 앉아 이 편지를 쓴다. 오늘 내가 좋아하고 자주가는 ‘서점극장 라블레’에서 마감 전 30분가량 맡아주게 되었어. 고작 30분이었는데도, 사장님께서 감사하다며 복숭아를 주셨어. 혼자 먹기에는 많아 복숭아 킬러인 너가 생각나 집 가는 길에 들렸어. 탐스럽게 익었지? 보기만해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게 맛있을 거 같아. 

 오늘 내가 서점을 30분 봐주게 된 건 사실 번개 책모임이 있어서야. 번개모임을 준비하시는 30분 동안 잠깐 봐주었어. 내가 평소에도 서점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얘기했던 거 기억나니? 좋아하는 책에 둘러쌓여, 조용하고 차분한 공기 속에서 책을 읽으며 카운터의 시선에서 책방을 느긋하게 응시하거나 사람들에게 이따금씩 책을 추천하고… 뭐 그런 로망이 있었단 말이지. 나는 어린왕자 속 사막여우처럼 약속했던 시간 보다 훨씬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어.  어떤 착장이 서점과 더 잘 어울릴지. 카운터에서 어떤 책을 읽고 있는 게 좋을지 콧노래를 부르며 준비했어. 

 그런데 역시 상상과 현실은 다르더라. 계산하는 법(결제수단은 왜 그리도 많은지), 북커버, 종이봉투, 무가지 등등 서점 만의 시그니처 서비스까지. 그동안은 당연하게 받았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 손길이 필요한 일이었는지 그 짧은 시간에도 알겠더라고. 인수인계를 받고, 오롯이 혼자 되니 긴장이 되었어. 

 아! 도움이 되고 싶으니 더 많은 책을 판매하고 싶다는 마음과 무서와 아무도 책을 안샀으면 하는 마음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나는 겉으로 의연한 척하며 우아하게 책장을 넘기며 밑줄을 긋는 척했어. 진짜… 글이 하나도 눈에 안들어오는거야. 그렇게 20분이 지났나? 손님들이 구경만하고 나가는데 슬슬 서운하더라. 그때 한분이 책 한권을 들고 오셨어! 쿵쾅대는 가슴을 애써 감추고 나는 “종이봉투 필요하신가요?”하며 물어봤고, 카드결제를 하고 영수증을 뜯는데… 맙소사! 제대로 못하고 가격이 적힌 부분이 찍하고 찢긴거야. 나는 당황하고 고개를 들어 급히 “영수증 버려드릴까요?”라고 위기를 모면했어. 그러고 종이접기부 출신으로써 가장 자신있었던 북커버를 시작했어. 생각보다 두꺼운 책이라 조금 버벅거렸지만, 나름 깔끔하게 북커버를 한 거 같아! 종이접기부의 자존심을 지켰어 친구야! 

 서점 마감 시간이 되고, 나도 번개모임에 참여했어. 이번에 버지니아 울프와 비타 색빌 웨스트가 서로 주고 받은 편지를 묶은 서한집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가 최근에 출간이 됐거든. 그게 계기가 되서 각자 읽고 싶은 서한집을 가져와 서로 돌아가면서 낭독하는 번개모임이었어. 번개모임이었는데도! 사람들이 총 9명이나 참여한 거야. 그런데 재미있는건 다들 다른 편지를 들고 온거 있지! 돌아가면서 각자 읽는데… 너무 좋았어.  

 나는 횔덜린의 서한집을 챙겨갔지. 흔히 횔덜린을 소개할 때 불우한 시인, 정신착란 등의 키워드가 강조되어서 외로운 사람이었겠다 싶어 연민이 느껴지는 시인이었는데, 서한집을 읽다보니 시인의 삶 전체가 불행했던 거 아닌거 같아서 안도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횔덜린 서한집에는 크게 ‘가족’, ‘친구’, ‘대작가’로 편지를 보낸 거 같아. 그런데 재미있는 거는 누구에게 쓴 편지인가에 따라 태도가 다른거야. 남동생에게는 단호하고, 친구에게는 다정하고, 대작가한테는 바짝 얼어있는게 느껴졌어. 비교하면서 읽는 것도 하나의 재미인 거 같아. 

 특히 남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주로 자신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정치적 소견, 종교적 관점 등등이 잘 드러나 있어서 횔덜린의 <휘페리온>,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읽을 때 큰 도움이 될 거 같더라. 이제 진짜 읽을 용기가 생겼어. <휘페리온>,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읽을 거야!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 같아!

 횔덜린 서한집에서 내가 낭독했던 부분은 괴테와 쌍두마차를 끌고 있는 ‘프리드리히 쉴러’에게 보내는 편지였어. 아… 횔덜린은 쉴러에게 편지 보낼 때 남동생에게 보내는 것과 다른 저자세가 내 직장 생활과 겹쳐져서 어찌나 짠하던지. 횔덜린이 쉴러랑 괴테에게 편지보낼 때 자신의 덕심과 존경심을 여과없이 보이고, 인정욕구를 얼마나 뽐내는지 몰라. 쉴러에게 원고를 부탁하는 편지에서는 사무실에서 영혼을 끌어모아 각종 쿠션어를 붙여가며 써내려가는 나의 청탁 메일이 겹쳐보였어. 아 진짜 업무 메일 쓰기 싫어…  아무튼 내가 더 일부러 굽신모드로 글을 읽어 내려가니 사람들이 소리내서 웃어서 좋았어. '

 친구들에게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겠다는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이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부분이 많아서 부럽더라. 근데 생각해보면 이 서한집은 대단한 거 같아. 많은 사람들이 횔덜린에게 받은 편지를 남겨두고 있어서 그걸 모아서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거잖아. 우리도 학창시절에는 참 많은 쪽지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너는 물건을 잘 버리지 않으니깐 분명 다 가지고 있겠지? 있잖아 나중에 나에게 보낸 편지는 꼭 불태워줄래? 점심메뉴따위 고민하고, 배고프다. 졸리다. 수업 재미없다. 밖에 없는 나의 쪽지가 아직 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 죽을 거 같아. 진정한 우정은 컴퓨터 하드를 부셔주는 사이래잖니. 

 너무 길어졌다. 이거 쓰는 동안 혹시나 너가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너 오늘 많이 늦네. 복숭아 달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 좀 덜 달다 싶으면 꿀을 뿌리고, 치즈 올려 먹으면 맛있다더라. 그럼 나는 집에 갈게. 안녕.

2022년 8월 20일 토요일 

너의 친구 A가’


   복숭아는 보이는 것만큼 달았다. 아직 습하고 더운 날씨에 쪼그려 앉아 쪽지를 썼을 친구를 생각하니 짠해졌다. 그나저나 이번 추석에 본가 가서 친구 A와 주고 받았던 쪽지를 찾아봐야겠다. 미안하지만 친구여. 절대로 불태울 생각이 없단다. 후훗 


                                                          <횔덜린 서한집/ 프리드리히 횔덜린(장영태 옮김)/ 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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