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오랜만에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잦은 야근과 저질 체력 등등의 이유로 기어코 4개월이나 미루다 겨우 만났다. 그만큼 쏟아낼 이야기도 많아 쉴 새 없는 근황 토크가 이어졌다. 이야기의 막바지에는 업무 중 만난 최고의 빌런 뽐내기로 변질했는데. 서로 핏대를 세우며 한바탕 답답함을 쏟아내다 ‘쎄함은 과학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조금이라도 쎄하다 싶으면 꼭 사고를 치거나 뒤통수를 맞는다고. 손뼉을 쳐대며 가장 크게 웃던 친구 A는 능숙하게 말을 이어가는데...
“맞아! 쎄함은 진짜 과학이라니까! 얘들아, 그러니깐 쎄하다 싶으면 일단 도망치고 봐야 해! 쎄함을 얘기하니, 마침 생각나는 독일 소설이 있군. 내가 여름마다 매번 재독 하는 책인데. 오싹해서 여름이면 꼭 생각이 난다니깐. 제목이, <너는 갔어야 했다>야. 주인공이 시나리오 작가인데, 차기작을 쓰려고 부인이랑 어린 딸이랑 셋이서 산속에 위치한 별장을 에어비앤비로 빌려. 언제나 그렇듯! 그곳에서 이상한 일이 반복되지. 가 버려. 분명히 거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창문에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어제 봤던 초상화가 다음날 보이지 않는다던가 말이야. 먹을거리를 사러 차를 끌고 마을 상점을 찾았는데, 상점 주인은 계속 찝찝한 얘기만 쏟아내. 주인공은 며칠 머물면서 몇 번이고 쎄함을 감지하지만 일단 넘겨. 가 버려. 소설 주인공이 시나리오 작가라고 했잖아. 덕분에 소설은 흥미로운 구성으로 전개돼. 자신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소설 이야기 중간중간에 등장하거든. 소설 전체가 주인공의 노트인 거 느낌이거든? 그래서일까? 주인공의 상황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분이 점점 되지 않게 돼. 그런 와중에 소름 돋게 주인공이 쓰지 않은 문장이 반복적으로 등장해. 가 버려. 시공간이 비틀린 듯한 그곳에서 미래의 주인공이 쓴 것인지 아니면 미쳐버린 주인공이 써놓고 잊어버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독자도 같이 혼란스러워지지. 대박인 거는 그걸 살린 표지지. 대충 보면 놓치기 쉬운 단어가 있어! 주인공이 이런 신호를 무시해서 어떤 결과를 발생시키는지 궁금하지!?! 다니엘 켈만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있는데, 진짜와 가짜의 혼동인데, SNS을 통해서 꾸며진 모습. 여러 자아를 만들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 대단하지 않니? 탈진실 시대를 소설에 녹여냈다니깐! 아무튼, 그런 때일수록 상대의 진짜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바로 그때 은근히 잘 통하는 것이 ‘쎄함’이지! 어! 얘들아 여기 건물 지하에 서점 있던데 들렀다가 가도 될까....?”
집 방향이 같은 친구 B와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친구 B의 손에는 친구 A가 영업한 책이 있었다. 친구 B는 “내가 A가 말 시작할 때 좀 쎄했거든. 결국 내가 홀라당 넘어가서 책을 사고 말았네... 재미... 있겠지?”
<너는 갔어야 했다/ 다니엘 켈만(임정희 옮김)/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