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계획할 때 참고하면 좋을 독일문학

호들갑 독일문학

by 박효경

호들갑 독일문학 16

- 복수를 계획할 때 참고하면 좋을 독일문학



중복을 맞이하여 친구 A가 채식 보양식을 만들어주겠다며 퇴근 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친구 A의 집은 요리를 하느라 열기로 후끈거렸다. 이대로 도망갈까 싶었지만, 친구 A는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서재로 날 안내하기도 했고, 땀을 한 바가지로 흘리며 요리하길래 참기로 했다. 이 집은 사람보다 책이 더 소중해 서재가 가장 쾌적하다. 요리가 완성되는 동안 나는 친구 A의 의자에 앉아 어질러진 책상에 유달리 눈에 띄는 글을 발견하고야 마는데...



‘XX를 복수하겠노라고 결심한 지 57일째. 아무리 책을 참고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 새X를 어떻게 조지지?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아 머리나 식힐 겸 집어 든 책에서 “유레카!”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제목은 <노부인의 방문>. 뒤렌마트의 희곡 중 하나였다. 대박이었다. 나는 왜 이제야 뒤렌마트를 알게 된 걸까? 하긴 독일 희곡작가라고는 브레히트, 뮐러밖에 몰랐으니 당연하지. 아무래도 나는 앞으로 뒤렌마트의 빅 팬이 될 거 같다. 아무튼... 이 희곡의 흥미로운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망해가는 어느 소도시 귈렌의 마지막 희망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 노부인이 45년 만에 고향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시장, 교장, 의사 등등 작은 도시의 인사들은 마지막 희망인 노부인으로부터 기부금을 얻고자 환심을 살만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 마침내 유년 시절에 사귀었던 소위 전남친 ‘일’까지 동원한다. 기부금만 준다면야 이들은 간도 쓸개도 빼줄 요량이었다. 노부인의 스웩은 등장부터 남달랐다. 노부인은 기차 시간표 따윈 무시하고 지나치는 역인데도 호기롭게 정지 버튼을 눌러 기차를 세운다. 따져 드는 승무원에게 불만이면 1,000만 원을 주겠다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어느 래퍼 경연프로그램에서나 볼법한 재력을 뽐내는 래퍼들의 가사 같았다. 희곡이라 그런가, 명대사가 연이어 등장한다. “어쨌든 집사는 평생 필요하니 남편들이 집사 이름에 맞춰야죠. (p.26)” 남편 따위 필요에 의해 갈아 치우는 노부인의 스웩에 다시 감탄했다. 참고로 노부인은 마을에 7번째 남편과 함께 도착했고, 곧 8번째 남편을 맞이했다. 대부호가 고향을 재방문한 것은 애향심이 아닌 복수심이었다. 노부인은 자신으로부터 구원을 바라는 마을주민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제안을 던진다. 노부인이 바라는 ‘정의’를 실현해준다면 10억을 주겠다고! 미친! 10억을 준다고?!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깔끔하게 돈 주고 사는 복수! 이 얼마나 완벽한가. 그런데 노부인의 제안 후 서서히 달라지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보며 내 마음은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돈 앞에 사회적 가치와 도덕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현대인. 돈이면 모든 걸 살 수 있는 세상. 천박하구나. 아 그래 이미 우린 자본이란 지옥에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 XX나 나나 이미 저주받았다. 내 아무리 복수한들 XX 네가 퍽이나 쫄까? 난들 퍽 기분이 날까? 아.. 망할 자본주의...’



친구 A의 일기장을 읽은 게 들키면 나의 양심에 스크레치가 나겠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시원했던 서재 방문을 열고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주방으로 향했다. “야! 뭐하면 10억을 준대?!”



<뒤렌마트 희곡선 중 노부인의 방문/ 프리드리히 뒤렌마트(김혜숙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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