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친구 A는 오컬트나 좀비, 유령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쫄보라 혼자 보지 못하고 매번 나를 집으로 부른다. 이번에는 나도 평소에 보고 싶었던 영화라 흔쾌히 응했다. 영화를 다 보고 깊은 여운에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너무 좋군. 절대 악과 절대 선은 없으며, 인간의 집착과 욕망이 강해지면 언제든지 악이 될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는 거 아냐.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짚어내는 이야기인데 불쾌하지 않게 풀어내서 좋다. 얼마 전에 읽은 독일 전쟁소설이 떠오르는걸. 원래 같으면 잔인하거나 신파적인 전개가 싫어서 전쟁소설은 꺼린단 말이야. 근데 그런 편견을 깨트려준 소설이었어. <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소설인데, 표지가 전쟁터로 떠나기 전 헤어지는 연인의 모습이라 더 그랬던 거 같아.
근데 예상과 달리 잔혹한 묘사나 신파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담백한 장면과 덤덤한 전개가 특징이었어. 오히려 전쟁의 잔혹함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고, 인간의 본성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더라고. 주인공 그래버가 전쟁 중 3주간 휴가를 얻고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는 간단한 이야기 구조야. 그래버가 있던 전장은 혹독하기로 유명했던 독일과 러시아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었어.
그런 전선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잠시 돌아왔는데, 속수무책의 공습은 전쟁터 못지않게 지옥 같은 거지. 집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가족의 생사를 알 길은 없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공포와 불안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어. 전선에서는 한걸음 떨어진 곳이지만 그렇다고 안전하지 못한 민간에는 전쟁을 대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목격돼. 나치 부역하면서 호화롭게 살아가는 동창도 급습으로 황급히 대피소로 피한 손님들에게 저녁식사 값을 요청하는 레스토랑 지배인. 동창의 정치적 입장에는 반대하지만, 비싼 통조림과 술을 서슴없이 나눠줄 때는 군말하지 않고 받아오는 주인공은 이들을 어떤 도덕적 프레임으로 해석해야 할지 매번 고민하지. 덩달아 읽는 나도 계속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되묻게 되더라고.
영화랑 비슷한 거 같아. 날 때부터 악인 존재는 없어. 욕망과 집착이 악을 키운 꼴이지. 그런 여러 군상을 덤덤하게 그려내는 게 전쟁의 참혹함을 설명하는 데 더 효과적인 거 같아. 제목과 표지에 속아서 읽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거 같아...”
영화의 여운에 젖어서 친구 A의 영업에 집중을 잘하지 못했다. 아 잠깐만, 영화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아, 이런 마음으로 친구 A는 책을 영업하는 걸까? 아 영화덕질모임을 소집하고 싶은데...
<사랑할 때 죽을 때/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장희창 옮김)/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