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여름휴가라 오랜만에 들른 본가에서 조카들과 놀았다. 여름휴가의 끝에 일하러 가기 싫다며 푸념하자 조카는 손톱을 잘라 쥐에게 먹이는 방법을 추천해줬다. 내 손톱을 먹은 쥐는 내 모습으로 변신해서 출근하고, 나는 집에서 누워서 쉬라는 거였다. 장난끼 없이 진지하게 말하는 조카의 태도에 순간 손톱깎이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친구 A에게 전하니...
“요즘에도 손톱 쥐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서양에도 분신테마 괴담이 있네. 도플갱어말이야. 도플갱어 독일어인 건 알지? 더블을 뜻하는 도플(Dopple)이랑 걸어다니는 사람(Gänger)가 합쳐져서 두 명의 나. 얼마 전에 도플갱어관련한 독일 소설을 읽었는데 완전히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분명히 20년 전 나와 마주친 나의 이야기였거든.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이란 소설이었어. 첫 소설을 쓰고는 15년 동안 다른 작품을 쓰지 못한 작가인 주인공이 옛 애인을 만나고자 약속을 잡고 나갔는데, 옛 애인이긴한데, 20년은 젊어진 30대의 모습을 한 여자가 있는 거야. 근데 들어보면 둘은 같으면서도 같지 않고, 근데 또 젊은 여자는 옛 애인의 과거 모습인 듯하고.
게다가 그녀의 남자친구는 곧 주인공의 젊은 시절인 거고. 과거와 현재와 망상이 뒤섞여버려. 겉으로 봤을 때는 부녀지간으로 보일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나는 둘은 약속 이후로 서로 가까워져. 그러면서 옛 애인의 젊은 모습인 그녀와 자신의 젊은 모습인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알려줘. 마치 이미 정해진 소설처럼 말이야. 살다가 그런 상상해보지 않아? 어차피 내 이야기를 완결이 되어있고,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상상. 거대한 나의 삶은 결국 누군가가 써둔 소설일뿐이라는 거.
근데 결국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삶이 소설일지 아닐지 말이야. 평행우주 같은 주인공과 젊은 남자의 삶도 사실은 조금씩 틀어져 있어. 젊은 남자는 주인공이 알려주는 것과 미묘하게 다른 선택을 하는 거든. 눈앞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도 덤덤하게 대처하는 그가 좋더라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꿈 이야기까지 여러 시간대가 혼재되어 있어서 소설을 읽어갈 때 혼란스럽긴 한데, 헤매며 읽는 게 재미있더라고. 도플갱어 만나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근데 손톱 쥐도 그렇고 도플갱어도 결국 자아가 별도로 있는 거잖아. 주체성을 찾는 게 의미가 있을까? 개별적인 존재에...”
도플갱어든 손톱 쥐든 뭐든 좋으니 나 대신 일만 해준다면 나의 정체성이든 뭐든 모두 기꺼이 드릴 텐데...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페터 슈탐(임호일 옮김)/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