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뭉게뭉게 증기에서 뿜어내는 옥수수 찌는 냄새에 절로 걸음을 멈추었다. 여름밤 평상에 둘러앉아 옥수수를 먹던 생각도 나서 2봉지를 사 들고 친구 A네 집으로 발을 돌렸다. 계절마다 떠오르는 음식은 추억이 깃들어 더 맛있다는 감성에 푹 빠진 나에게 친구 A는 찬물을 끼얹는데...
“아직 따뜻해서 맛있네. 어렸을 때는 엄마가 간식으로 과자 말고 옥수수, 감자 주는 게 싫었는데, 진짜 어른 되니깐 이게 묘미네 묘미야. 난 요즘 옥수수를 보면 샛노란 표지의 책이 떠올라. 폴렌타라고 들어봤니? 옥수숫가루로 만든 죽 같은 건데, 이게 유럽에서 배고픈 시절에 먹던 음식이라고 하더라고. 폴렌타도 낯선데, 책 제목이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야. 완전 궁금하잖아! 도대체 왜 아이를 끓이는가! 작가가 루마니아 태생인데, 엄마는 유명한 서커스단원이고, 아빠도 광대였대. 서커스단은 유랑하잖아. 학교도 다니지도 않고 유럽 전역을 돌다가 스위스에 정착하게 되어서 독학으로 독일어를 배워서 처음으로 쓴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하더라고.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의 이야기는 주인공의 고향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이더라고. 아이가 옥수수자루에 숨어있는 줄 모르고 아이에게 줄 폴렌타를 끓여주려던 할머니가 통째로 넣었거나, 폴렌타나 눌어붙지 않게 저으라고 아이에게 당부하고 잠시 할머니가 다른 일을 하던 차에 빠졌거나 등 주인공은 나름 아이가 폴렌타에서 끓는 이유를 추측해 보기도 해. 그런데 이 이야기가 주인공의 엄마가 곡예를 하러 갔을 때 엄마가 죽을 까봐 불안한 주인공이 언니에게 들려달라고 해. 엄마에 대한 걱정이 커질수록 이야기는 더 잔인하게 각색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더 큰 불안으로 덮어버리는 거더라고. 머물 집 없이 계속 떠돌이 생활하고, 주변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쏟아내고, 읽을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언니를 바라보는 아빠의 시선은 불쾌하고 엄마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이방인, 어린아이, 여성, 문맹 등등 여러 불안의 건더기가 한데 뭉쳐있는 소설이야. 불안을 더 큰 불안으로 덮어야만 버틸 수 있는 아이의 심정이 안타까우면서 여러 생각들이 떠오르는 흥미로운 소설이었지 근데, 폴렌타는 무슨 맛일까? 죽을 굳혀서 먹기도 하던데 꼭 생긴 게 술빵같더라고 술빵 맛있겠다...”
청량하고 그리운 내 여름 옥수수는 친구 A의 폴렌타 얘기로 변질되고 말았다.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아글라야 페터라니(배수아 옮김)/ 워크룸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