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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연 Sep 06. 2020

‘쩌리’라는 특권

TV언박싱 21. <다큐인사이트 개그우먼>

쩌리짱과 안 웃긴 형돈이

TV 예능은 구석에 있는 사람들을 그동안 어떻게 다루었을까? 10년 동안 사랑을 받아온 <무한도전>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시청자에게 외면받는 출연진을 도왔다. 이를테면 정형돈이 시청자에게 오락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때 ‘안 웃긴 형돈이’라는 별명을, 흐름을 못 잡는 정준하에게는 ‘쩌리’라는 별명을 붙였다. TV 예능에서 별명이 생긴다는 것은 새로운 캐릭터가 창출되는 것으로, 결국 이들은 그간의 성과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 것과 같았다. 오프닝마다 서는 자리에 중심과 끝은 존재했지만, 끝자리에 배치되는 것이 낙오를 뜻하진 않았다. 그러니 <무한도전>의 명맥만큼 출연진의 출연 기회 또한 안정적인 편이었다.


프로그램 입장에선 논란의 인물을 시장성 있는 인물로 전환한 것이니 훌륭한 전략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득 의아해진다. 오랜 시간 예능 프로그램 메인 자리에 여성을 세울 수 없던 이유로 방송가가 원래 치열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온 것 치고 상당히 관대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제작진이 출연진을 보호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면 왜 여성들에겐 이게 적용되지 않았을까. 방송국 안의 남성 연대가 어떻게 ‘쩌리라는 특권’을 만들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누군가는 부족함이 새로운 캐릭터가 되는 동안, 또 다른 누군가는 이유 모를 무명기를 거쳐야만 했다.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1990년, 여성 희극인 최초로 김미화가 KBS 연예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다음 여성 대상 수상자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28년. 이 긴 시간에 대해 이성미가 말했다. “사실 너무 오래 걸렸죠, 2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기까지. 그 오랜 기간 동안 인물이 없던 건 아니었어요.” 박미선, 이경실, 팽현숙, 김지선, 정선희…. 그동안 외면받은 숱한 얼굴들이 스쳐 갔다.



공식 선발대회로 뽑힌 첫 개그우먼 이성미는 여성 역할이 필요한 코너에 자동으로 소속됐고, 송은이는 얼굴이 앳되고 몸집이 작다는 이유로 대부분 누군가의 딸이나 동네 꼬마로 나왔다. 우악스럽고 강한 캐릭터를 맡았던 김숙과 박나래는 대중으로부터 비호감을 얻으면서 구석으로 밀려나 10여 년의 긴 무명기를 거쳐야만 했다. 대체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넘어서지 못했고 주인공을 조력하는, 일명 ‘치고 빠지기’ 전문가가 되어갔다.


개그우먼은 그렇게 배경이 됐다. 자리를 깔아주고 자기 몫을 다한 뒤에 조용히 나가는, 그게 전부였던 사람들. <다큐 인사이트>는 여성 희극인이 무대에 들어와서 그대로 나가는 모습을 아름다운 선율에 맡겨 보여준다. 오가는 여성 희극인 모두 제대로 된 대사 한 구절을 읊기가 어려워 발걸음만 시종일관 바쁘다.

https://youtu.be/AmiVUHEnwQQ?t=459

'링크 주소'를 클릭하면 제가 설정한 부분을 따로 보실 수 있습니다. ⓒKBS 다큐 인사이트



얼짱과 폭탄 그 사이

박나래가 말했다. “저는 얼굴로 웃기는 개그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저만이 할 수 있는 개그를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얼굴로 웃겨야 대중에게 더 빨리 다가갈 수 있더라고요.” 이어지는 오나미의 말. “제가 방송국에 처음 왔을 때 선배님들이 그러더라고요. “너구나…?” 저는 제가 못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이게 무슨 말인 줄 몰랐어요. 제 첫 대사가 ‘나는 여자다!’ 였는데 사람들이 엄청 웃는 거예요. 내가 여자인 게 왜?, 싶었어요.”



‘뚱뚱한 여자’와 ‘못생긴 여자’. 이 특성들이 웃음으로 거래되는 이유를 돌이켜 보면, 특정 범주에서 벗어나 우스꽝스러움을 산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범주는 남성 중심사회가 공고하게 만든 미적 기준에서 비롯했다. 여성의 외모를 쉽게 평가하는 문화가 개그우먼을 비껴갈 리 없었다. 물론 예쁜 희극인도 있었다. 그럼 좀 편했을까? 얼짱 개그우먼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던 김지민이 내내 들어야 했던 말은 “개그우먼이 왜 예쁜 척 해?”, “언제 웃길 거야?” 같은 것이었다. 얼짱이라는 별명에 반짝 집중해놓고, 돌연 그의 삶 자체가 모순인 것 같이 반응했다. 그의 곁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함정만이 남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외모 평가 개그를 받아들이는 관중의 태도가 바뀌고, 다양한 체형과 외모의 여성 롤모델이 대중에게 떠오른 덕이다. 박나래가 등장한 나이키 광고에 많은 이들이 크게 환호했던 이유도 그와 같다.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라는 말과 함께 한쪽 입꼬리가 멋지게 올라간 당당한 모습. 그리고 그 사진 밑에 양세형이 댓글을 달았다. “ㅋㅋㅋㅋ확 튀는데?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세형 씨, 그런 거요. 그런 거 이제 안 웃기다고요.



살아남기로 했다

안 그래도 작은 파이를 나눠 가져야 하는데 예능의 판도가 바뀌면서 미혼 개그우먼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무한도전>, <1박2일>, <라인업>, <남자의 자격>, <나는 남자다> 등 남성 출연진이 무더기로 나오는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KBS 김상미 PD가 남성 출연진만 집중 조명되던 시절을 되짚었다. “‘여자는 재미없잖아’ 라는 말이 통용되던 때가 있었어요. 여자들은 완전히 망가지지 않고 몸을 사린다는 그럴싸한 이유도 붙으면서요.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성공한 기존 방송 구성을 서로 따라가는 환경도 한몫을 했죠.” 언제나처럼 일이 늘 있을 거라고 믿어온 김숙과 송은이의 고용도 불안정해졌다. <아빠, 어디가?>를 비롯한 <슈퍼맨이 돌아왔다>, <아내의 맛> 등 육아∙부부 예능이 늘어나자 남편도 아이도 없는 이들이 나설 자리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여자들이 필요가 없어지는 지경까지 간 거죠. 능력 있는 개그우먼 후배들이 일자리를 많이 잃어버렸어요.” 이성미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가 알지도 못한 채 그대로 사라진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조금 슬퍼졌다. 그리고 이 슬픔을 딛고 송은이는 자기만의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팟캐스트 <비밀보장>, <밥블레스유>, <김생민의 영수증> 그리고 ‘셀럽 파이브’까지. 전례 없던 콘텐츠에 많은 이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제작자, 출연진, 시청자 모두 벽인 줄로만 알았던 문을 여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생각의 판이 크게 뒤집혔다.

https://youtu.be/KWospJK_sqA

'링크 주소'를 클릭하면 제가 설정한 부분을 따로 보실 수 있습니다. ⓒKBS 다큐 인사이트


종종 눈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마흔 파이브’. 허경환·박성광·김지호·김원효·박영진은 어느덧 마흔에 접어들어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밴드를 결성했다. '셀럽 파이브’를 따라 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보다 먼저 결성했다고는 하지만, 글쎄. 궁색 맞은 말로 들린다. 도전에는 사회적 맥락이 필요하다. 무엇에 대한 저항이고, 도전 이전의 삶은 어땠는지 이해될 때 비로소 대중도 공감하게 된다. 마흔 파이브 멤버들이 나이 듦에 개인적인 설움은 있겠지만 그게 그들에게 어떤 사회적 한계로 작용했는지 시청자는 알 수 없다. 이렇게 공감이 부재한 상태에서 셀럽 파이브를 연상시키는 타이틀을 갖고 온 건 큰 고민을 들이지 않고 결정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놓친 것이 있다면 단 하나, 셀럽 파이브는 결코 낭만으로 만들어진 그룹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청자의 숙제

<무한도전>에서 김숙과 송은이를 활용했던 방식은 고정돼 있었다. 소개팅 상대자(‘로맨스가 필요해’ 편), 데이트 상대자(‘만약에 If’ 편), 백그라운드 댄서(‘나름 가수다’ 편). 잠재적 연애 대상으로 보거나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만 부여하면서, 김숙과 송은이를 어렵게 만든 기존 남성 중심적 구조를 연장시킬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굴레를 끊어낸 것은 무엇일까. 송은이 사단의 결단?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등장? 여성 제작진의 입지 증가? 모두 필요하고 의미 있다. 하지만 나는 이에 호응하는 적극적인 시청자를 먼저 꼽고 싶다. 2019년 MBC 연예 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은 안영미가 그랬다. “제가 <라디오 스타>에 들어오게 된 게 시청자들 댓글 덕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여러분이 재미있다, 웃기다 해줘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시청자가 긍정적인 반응을 하니, 개그우먼이 일자리도 얻는다.

https://youtu.be/LS0wcajBu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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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성공할 수는 없다.  맘대로 찾아오는 암흑기를 피할  없고,  사람의 역사에서 무명기는  자체로 의미 있기도 하다. 다만,  쩌리 시절을 하나의 전략으로 모든 이들이 이용할  있다는 전제하에. 주인공을 맡지 못해서, 외모 평가 때문에, 업무 환경이 바뀌어서와 같은 외부적인 요건 하나로 구석에 몰린   공정하지 못하다. <다큐 인사이트> 마지막 인터뷰를 마쳤다. 송은이가 어두운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나갈 . 래서  틈으로 빛이 환히 들어올 , 예능 역사의 2막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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