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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연 Sep 20. 2020

하이킥 시리즈에는 책상이 없다

TV언박싱 22. <하이킥 시리즈>

김병욱과 하이킥 시리즈

김병욱 PD 하이킥 시리즈는 2007 MBC <거침없이 하이킥> 시작으로 2009년의 <지붕 뚫고 하이킥>, 2011년의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으로 이어졌다. 정일우, 황정음, 최다니엘, 이종석, 김지원  신예 스타를 배출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에피소드마다 사회 풍자와 재치를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호평을 받곤 했다. 이러한 뜨거운 인기의 결과로 ‘2007 MBC 연예대상에서는 이례적으로 이순재가 <무한도전> 팀과 함께 대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10여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하이킥 시리즈는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나문희의 “호박 고구마”나 황정음의 “됐고!” 같은 유행어가 계속해서 제 N의 콘텐츠로 변형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렇게 추억에 빠져 하이킥 시리즈를 다시 보고 있었는데, 아니 이게 뭐야? 이상한 걸 발견하고 말았다. “책상이 없잖아?”



책상 말고, 화장대

책상의 부재는 대부분 여성 인물에게 해당되었다. 무언가를 공부하거나 읽고 쓸 때, 이들은 책상이 없어 거울 속 자신과 나란히 화장대에 앉아야만 했다. 남성 인물들의 생활 환경을 비교해 보면 문제점은 더욱 극명해진다. 공부와 담 쌓은 윤호에게도, 다락방 신세인 민용에게도, 조연인 세호에게도 모두 책상이 있다. 더 늘어 놓자면, 공부 안 하는 준혁이와 종석이도, 백수인 준하도, 똑똑한 민호와 계상이도 모두 무언가를 하기 위해 책상 앞으로 향했다. 모든 시즌을 통 틀어 공간의 크기와 상태, 연령대, 주∙조연, 지적 수준, 성격을 막론하고도 남성 인물들은 자신의 일에 바로 몰입할 수 있는 책상 하나쯤은 갖고 있던 것이다.



반면 여성 인물의 방 풍경은 많이 달라 보인다. 책상 자체가 없고, 필요할 때마다 화장대로 그 역할을 대신했다. 서사의 개연성을 위해서도 책상은 몹시 필요했다. 먼저, 해미에게 책상이 필요했던 건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신지가 러시안 친구와 나누는 대화 내용을 기필코 알아내겠노라는 의지 하나로, 며칠 만에 러시아어를 터득해냈다. 심지어 이 에피소드는 그가 러시아 대사관에 가서 한의학 강연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해미는 비범하고 뛰어난 언어능력과 집중력, 의지력을 보여줬지만 공부하기 위해 찾은 게 그러니까… 화장대다.


문희는 어떨까. 그가 화장대에 앉아 기록한 건 바로 ‘방구보감’이었다.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았던 준하의 몸 상태를 매일 관찰하고 점검하면서 모든 기록을 세세하게 남겼다. 하루하루 변수를 두어 자기만의 실험을 완벽하게 이행했고, 모든 과정을 아카이빙으로 만들었다. 이야기 끝엔 준하가 마침내 장 기능을 회복하면서 문희의 시도가 얼마나 유의미했는지 보여줬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한의사는 해미와 순재, 두 명이다. 이들은 의학 지식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잘 알았지만 준하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건 다름 아닌 문희였다.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궁리하고 연구한 사람이자,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행동한 인물이었다. “내가 교육만 제대로 받았으면 지금은 좀 달랐을까” 하는 탄식을 종종 내뱉던 문희였기에 보감 작업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젠 그 말을 한번 바꿔보고 싶다. 문희에게 진즉 책상이 있었다면, 그는 더 많은 것을 상상하고 시도해볼 수 있었을까?



시즌2와 3도 다르지 않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정음은 대학 서열화의 상징이다. 유흥과 쇼핑에 빠져 철없이 해맑기만 하던 정음이 현실적이고 어두운 면면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도 자신이 사회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다. 학벌을 속이기 위해 온갖 소동을 벌이고 처음으로 합격한 회사가 폭력을 일삼는 곳이란 걸 경험하면서 그는 다시 제대로 살아보고자 마음을 먹고 공부에 매진한다. 그런 결연한 다짐이 이루어진 장소는 역시나 화장대다. N포세대의 상징인 진희는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고시원을 전전하는 가난한 취준생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고 싶던 광고계 취업도 미루고 잠시 보건소 인턴으로나마 일을 구할 때. 심지어 한번 떨어진 경험에 비춰 더 악에 바쳐 공부할 때. 그는 화장대 앞으로 향했다. 잠깐, 진희는 하선의 방에서 얹혀 살았는데? 원래 방주인의 성격을 돌아봐도 이상하다. 국어 선생이고 편지와 일기 쓰기를 퍽 좋아하는 하선이 책상 하나 없다니.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책상



하이킥 시리즈를 말하니 너무 오래 전 이야기를 끌고 온 것처럼 보일 테지만 멀지 않은 과거까지도 이런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2018년, 김병욱 PD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시트콤 조선TV <너의 등짝에 스매싱>에서도 여전히 화장대가 책상을 대신한 장면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구 배치는 한정된 공간 안에 거주자가 가장 필요하거나 좋아하는 가구를 우선 순위에 맞춰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가구를 한 곳에 둘 수 없는 현실적 제약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왜 책상이 없는지’ 보다, ‘왜 화장대가 책상보다 우위를 차지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연출의 세계에서 인물의 성격으로든 서사의 개연성으로든 있어야 할 게 사라진 그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 답은 아주 명료한데, 화장대의 기능을 떠올려 보면 된다. 여자라면 당연히 꾸미길 좋아할 거라는 믿음이나 혹은 그래야 한다는 통념이 서사적 논리를 뛰어넘어 TV 안에 살아남고만 것이다. 인물의 배경과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여성의 특성’일 것이라고 뭉뚱그린 게으른 판단으로 말이다. 그러니 이 장면들은 여성 인물을 바라본 구태의연한 해석이 그들의 방으로 교묘하게 침투한 증거이자 결과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에게 남긴 역사적 유언이 있다. 여성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고정수입과 자기만의 방이라는 것. 이 말에 깊이 동의하며, 한 가지 더 추가해 보고 싶다. ‘여성에겐 원하는 때에, 바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책상이 필요하다.’




안녕하세요. 자연이에요! "하이킥 시리즈에는 책상이 없다"를 포함한 저의 대중문화 비평 글이 한 권의 책이 되었어요. <빈센조> <캠핑클럽> <달리는 사이> <sky캐슬> <동백꽃 필 무렵> 등 브런치에 없는 글들까지 모았습니다. 브런치에 있는 글들도 거의 새로 쓰는 것과 가깝게 탈고를 했고요! 책이 나온지 일주일만에 네이버에서 '베스트셀러' 딱지도 붙여줬습니다. 설레요!

그럼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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