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있는 시대의 역설
"천천히 걸어서 목표를 놓치는 것이 아니라
전혀 걷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 홍순철 -
사무실에서 문득 창밖을 바라봤어요.
빗방울이 창문을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왠지 모를 위안을 주더군요.
길 위의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우산도 없이 뛰어가고 누군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또 누군가는 그저 건물 밑에 멈춰 서 있었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언제부터 '속도'에 이렇게 집착하게 된 걸까?
요즘 친구들과 만나면 항상 듣는 이야기가 있어요.
"아, 나 요즘 너무 뒤처지는 것 같아."
"남들은 다 앞서가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서 불안해."
우리는 모두 같은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SNS를 열면 누군가는 승진했고 누군가는 결혼했고,
누군가는 해외로 떠났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죠.
그런데 문제는 정말 '천천히 가는 것'일까요?
지난 주말 10년 만에 만난 친구와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친구는 대학 시절부터 작가가 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했다며 자책하더군요.
"매일 글을 쓰려고 해. 그런데 시작하면 마음에 안 들어서 지워.
완벽한 첫 문장을 찾고 싶은데 그게 안 나와."
창작의 고통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친구의 문제는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정의해 나가죠.
그런데 현대 사회는 기묘한 역설에 빠져 있습니다.
무한한 정보와 선택지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행동하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영화 고르는 데 30분을 소비하고
결국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경험이 있나요?
우리는 모든 옵션을 살피느라 정작 선택은 하지 않습니다.
책상 위에 먼지가 쌓인 드로잉 키트, 한 번도 열지 않은 프로그래밍 책.
1년째 '언젠가는' 시작하겠다는 운동 계획까지.
우리 주변은 시작하지 않은 가능성으로 가득합니다.
"삶은 앞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뒤돌아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한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은 실천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뒤돌아볼 기억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앞으로 나아가야 하잖아요.
그날 밤 책상에 앉아 오래 전의 일기를 펼쳐봤어요.
10살의 나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언젠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고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아직도 '언젠가'를 기다리고 있는지.
별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는 수백, 수천 년이 걸립니다.
느리지만 그 빛은 결코 멈추지 않죠.
새삼 밤하늘에 펼쳐진 별이 더욱 경이롭게 보입니다.
디지털 시대는 우리에게 '즉각적인 만족'을 약속합니다.
클릭 한 번으로 영화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들—글쓰기, 악기 연주, 인간관계 형성—은
시간과 꾸준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5시간 동안 글을 쓴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능이 있든 없든 먼저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라고 말했죠.
위대한 업적의 비결은 종종 이런 소박한 진실에 있습니다.
그저 시작하는 것.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짜 두려운 것은 시작 자체일지도 모르죠.
시작한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하고, 변화는 항상 불확실함을 동반하니까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그만큼 불안함도 큽니다.
모든 선택지를 다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것'도 되지 못하게 만드는 함정이 되기도 하죠.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오늘 내딛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첫걸음은 무엇인가요?"
어쩌면 그것은 단 한 문장을 쓰는 것일 수도 있고,
5분 동안 달리는 것일 수도 누군가에게 전화 한 통을 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 아니라 움직임 자체입니다.
느리게 가더라도 적어도 당신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까요.
창밖의 비는 그쳤습니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어요.
오늘도 세상은 각자의 속도로 나아갑니다.
누군가는 달리고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아직 서 있겠죠.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진짜 문제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첫걸음을 내딛으려 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