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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언스타임즈 Feb 13. 2019

잘못 인정한 의사에게 주어진 노벨상

노벨상 오디세이 (76)

고대 중국과 십자군 군대에서는 목 부위가 지나치게 붓거나 무기력증에 빠진 환자들에게 해조류를 먹였다고 한다. 해조류에는 요오드가 많이 들어 있는데, 건강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미네랄인 요오드는 특히 갑상선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성분이다.

     
갑상선의 기능이 저하되면 영양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켜 대사작용이 현저히 저하된다. 따라서 갑상선은 성장기에 특히 중요할 뿐더러 성인의 일반적인 영양에도 매우 중요하다. 또한 갑상선은 인체의 내분비를 정교하게 조절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이 중요한 갑상선을 떼어내야 할 때가 있다. 갑상선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면 기도를 압박해 자칫하면 질식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프랑스 의학학회에서는 의사들에게 갑상선 수술 금지령을 내렸다. 이유는 그 수술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갑상선 절제술을 받은 환자의 사망률은 무려 75%에 이르렀다.

갑상선 연구에 대한 업적으로 190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밀 테오도어 코허. ⓒ Public Domain 


교통이 불편한 내륙의 산악 지역에 위치한 스위스에서도 요오드 부족으로 갑상선종을 앓는 환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갑상선 수술 사망률이 13%밖에 되지 않는 명의가 있었다. 베른대학의 외과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에밀 테오도어 코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성공률은 보인 데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는 새로 도입된 소독술을 이용해 상처 치료를 철저히 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수술 시 출혈을 최소한으로 막는 그만의 수술 노하우에 있었다. 그는 지혈법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한 장본인이다.
     
외과의사로서는 최초의 노벨 생리의학상
   
갑상선은 수술 시 특히 피가 많이 나고 염증도 많이 생기는 부위여서 사망률이 그처럼 높았던 것이다. 마지막 비결은 마취에 있었다. 그는 마취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국소마취를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덕분에 그는 부갑상선만 남겨둔 채 갑상선 조직을 완전히 절제할 만큼 대담한 수술 솜씨를 뽐냈다. 당시에는 그처럼 갑상선 전체를 완전히 절제할 수 있을 솜씨가 뛰어난 의사가 거의 없었다.

갑상선은 수술 시 피가 많이 나고 염증도 많이 생기는 부위여서 19세기 중반 갑상선 절제술 환자의 사망률이 75%에 달했다. ⓒ Wikipedia 


그런데 코허는 동료 의사로부터 놀라운 연구 결과를 전해들었다. 1882년 제네바에서 르베르댕 교수가 갑상선 수술을 받고 몇 개월 후 생긴 심각한 부작용의 사례를 의학학회에서 발표했던 것이다.

     
코허는 자신에게서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서도 그 같은 부작용이 일어났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부분 절제술을 받은 환자들은 괜찮았지만, 갑상선 조직을 완전히 절제한 환자들의 경우 절반 이상이 부작용을 앓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해인 1883년 4월, 그는 기존에 자신이 했던 것처럼 갑상선을 완전히 절제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인정하는 설명회를 열었다. 이후 코허는 수술을 할 때 기능할 수 있는 갑상선의 일부는 남겨놓고 하는 부분절제술만 시행했고, 그 결과 수술 후에도 부작용이 생기는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코허는 철도 엔지니어였던 부친과 종교심이 매우 강했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는 태어난 직후 세례를 받았으며, 어머니처럼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자신의 모든 성공과 실패를 신에게 돌렸으며, 특히 과학 연구에서 물질주의의 부상을 경계했다.
     
아마 이 같은 성향이 당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자신의 수술법에 대한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데 한몫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뿐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올바른 수술법을 적극 홍보하고 다녔다. 그의 이런 행동은 갑상선 수술 후 생존율을 크게 높였으며, 갑상선의 생리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그만큼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코허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갑상선에 대한 올바른 수술법을 전파한 지 26년 후인 190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외과의사가 받은 최초의 노벨상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올바른 수술법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코허는 외과의사 최초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 Pixabay


학생들에게 존경 받았던 스승

   
그가 평생 시술한 갑상선 절제술은 약 5000회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특정 지역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갑상선종의 발병 원인에 대해 연구하고 갑상선 기능 장애와 관련된 크레틴병도 연구하는 등 갑상선에 대한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병리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이외에도 그는 견관절 탈구의 정복, 창상에 대한 방부적 치료법, 골수염, 헤르니아, 담도질환, 위절제, 총상처치법 등의 중요한 연구에 전념했다. 새로운 외과수술용 기구도 고안했는데, 그중 톱니 모양의 코허겸자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그가 처음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연구는 탈구된 견관절의 새로운 시술법이었는데, 이 방법은 기존 시술보다 훨씬 덜 고통스럽고 안전했으며 한 명의 의사가 시술할 수 있었다.
     
생전에 249편의 논문과 책을 출간한 그는 학생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거의 100학기 동안 베른대학의 약 1만 명의 학생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가르쳤다. 그가 배출한 박사만 해도 130여 명에 이른다.

생전에 249편의 논문과 책을 출간한 코허는 약 1만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130여 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 Pixabay


한 번은 그가 재직하던 대학보다 훨씬 좋고 큰 대학 클리닉을 갖고 있던 프라하에서 그를 교수로 초빙한 적이 있었다. 외과의사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할 만한 곳이었지만 그는 스위스에 그대로 남기로 결정했다. 그가 그렇게 결정한 이유 중 하나로 자신을 향한 학생들의 애정을 꼽았다.

     
하지만 외과의사로서의 과도한 업무가 결국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1917년 7월 23일 저녁 그는 응급환자를 수술해달라는 병원의 호출을 받고 급히 집을 나섰다. 수술을 끝낸 그는 몸이 좋지 않았지만 연구 작업을 조금 더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나서 곧 그는 의식을 잃었고 나흘 후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성규 객원기자


기사원문: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9e%98%eb%aa%bb-%ec%9d%b8%ec%a0%95%ed%95%9c-%ec%9d%98%ec%82%ac%ec%97%90%ea%b2%8c-%ec%a3%bc%ec%96%b4%ec%a7%84-%eb%85%b8%eb%b2%a8%ec%8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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