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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과학쌤 Aug 08. 2020

예민한 사람이면 좀 어때

누군가의 특성을 설명해주는 무수한 형용사들이 있다.

활기찬, 학구적인, 매력적인, 조용한, 꼼꼼한...

어떤 형용사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모두 기분 좋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어떤 형용사는 한 꺼풀 아래에 미묘하게 다른 뜻을 품고 있기도 하며, 어떤 형용사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나는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다. 냄새에 예민해서 가리는 장소와 가리는 음식이 많고, 소리에 예민해서 귀마개가 없으면 쉽게 잠들지 못하며, 위생에 예민해서 충분히 깨끗한 화장실을 찾을 때까지 생리 욕구를 참기도 한다. 그러나 '예민한'이라는 형용사는 대개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기 때문에, 예민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들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곱게 자랐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건네는 사람들의 비언어적인 표현은 곱지 않았다. 유난스럽다거나 예민하다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최대한 의견을 내지 않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대충 동의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지만 나는 곱게 자라지도 않았고, 곱게 대접받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그저 원하는 취향이 있을 뿐이었다.



'예민하다'는 사전적으로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1.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2.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


나를 살피는 감각이 날카롭고, 내가 원하는 것을 느끼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라면, 나에 대해서는 조금 더 예민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나의 예민함으로 인해 주변 사람이 불편해질까 전전긍긍해왔는데, 그러는 동안 내 마음의 불편함은 얼마나 들여다보았는가.

예민함을 인정하고, 내 감정과 나의 요구에 민첩하게 반응하기로 한 순간부터 내 삶은 조금 더 설레기 시작했다. 불편함에 민감한 만큼 행복감과 기쁨 또한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 때문이다.


이사를 앞둔 상황에서 가족들은 직장과 가지만 꽤나 낡은 집을 구해 함께 살기를 바랐다. 적당히 동의하 그 집에서 살아간다면, 내 예민함을 중심으로 사소한 불행들이 모일 것만 같았다. 기 예민한 사람인 것, 더 예민해져 보자. 나의 모든 예민한 감각이 만족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 혼자 지낼 새 집을 구했다. 수백만 원의 가계약금을 포기해야 지만, 집으로 향하는 매일의 발걸이 설렜고 마음이 놓이는 간에서의 오롯한 휴식 행복했다.


사회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일하던 어느 날에는, 그들의 문화에 대충 동의하는 대신 예민한 내 감정을 따라 근무지를 옮기기로 했다. 높은 급여나 의미 있는 경력을 쌓을 수 없게 되었지만, 새로운 근무지에서 잘 맞는 사람들과 일하면서 월요병이 사라졌다. 아침 출근길에도 웃을 수 있는 내 모습에 설렜고, 새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매일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예민한 나의 선택들은 크고 작은 설렘으로 나를 이끌었다. 특별히 좋은 향의 섬유유연제와 바디워시를 예민하게 골랐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흰 침대보와 베갯잇을 예민하게 관리했다. 소소한 일상의 배경색에 행복이 스며들었다. 힘든 어느 날에는 예민한 나를 달랠 꽃을 스스로 선물하기도 했고, 여행을 떠날 때 비싼 숙소 분위기 좋은 음식점을 예민하게 선택하기도 했.


피아노를 치고 싶은 날, 고급진 음식을 먹고 싶은 날, 깊은 잠에 빠지고 싶은 날, 친구와 함께 보내고 싶은 날을 스스로 안다. 기나긴 연애의 끝을 고해야 하는 순간이나 다니던 직장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 스스로 안다. 매 순간 나의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알고 에게 가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에서 주인공 유는 말한다.

"어떤 문제는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따르는 게 좋지 않아요? 해야 하는지 아닌지 말고 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주인공 찬란은 생각한다.

'해야 하는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름대로 안도하며 살아왔는데, 그 사이에 하고 싶은 게 뭔지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때로 주변인들의 시선이나 사회적인 요구에 맞추어 해야 하는 행동들을 결정하느라 나를 놓치기도 한다. 내 마음속 목소리에 조금 더 예민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행복한 설렘은 매일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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