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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영 May 18. 2020

인간이 정복한 감염병

천연두와 소아마비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암 정복 끝이 보인다" "치매 정복 눈앞" "식생활 개선으로 당뇨병 완전정복" ... 암, 치매, 당뇨 등 치료가 어려운 병일수록 이런 기사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비슷한 제목만 봐도 과장광고 아닌가 싶을 지경입니다. 사실 공중보건에서 암, 치매, 당뇨같은 만성질환은 완벽한 치료법보다는 적절히 관리하면서 건강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완전정복"이라는 목표가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감염성 질병입니다. 요즘에는 코로나19를 정복하는데 세계의 관심이 쏠려 있지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감염병 중에서 인간의 힘으로 정복한 질병이 딱 하나 있습니다. 1980년에 세계보건기구가 공식적으로 박멸되었다고 선언한 천연두입니다.



천연두는 천연두 바이러스(Variola virus)에 의해 생기는 감염성 질병으로 천연두 환자의 비말 등을 통해 감염되고 일단 감염되면 2주 내 사망할 확률이 30퍼센트인 무서운 병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30퍼센트에 속하지 않더라도 온몸을 뒤덮은 발진이 가라앉고 딱지가 떨어지면서 평생 사라지지 않는 흉터를 남기지요. 천연두(smallpox)의 역사는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람세스 5세의 미라에 천연두로 사망한 흔적이 관찰된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삼천 년 전에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80년에 공식적으로 박멸될 때까지 수없이 많은 유행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20세기에만도 3억명 이상이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6세기 아즈텍에서 천연두 유행을 기록한 그림


천연두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이나 그에 대항해 싸워온 역사도 깁니다. 천연두 치료제는 역사상 한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습니다. 대신 천연두에 걸렸다가 살아 남은 사람은 평생 다시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인두법이라는 예방법을 만들어냈지요.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딱지를 가루로 만들어 코로 들이마시거나 피부에 상처를 내어 접촉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천연두를 약하게 앓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면역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백신과 흡사하지요. 다만 실제로 천연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접종하는 셈이므로 아주 위험했습니다. 인두를 접종한 백 명 중 두세 명은 인두로 인해 발병한 천연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해요. 천연두 바이러스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얻는 방법이 바로 1796년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개발한 우두법입니다. 젖짜는 여자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관찰 결과를 근거로 소의 천연두라 할 수 있는 우두에 걸렸다 나으면 천연두에 면역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추론해낸 것이지요. 천연두보다 훨씬 독성이 약한 우두를 사용해서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얻는, 최초의 근대적 백신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바이러스는 커녕 미생물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던 시절에 이미 백신은 존재했던 셈이에요.


에드워드 제너가 제임스 핍스라는 어린이에게 최초로 우두를 접종하는 모습


에드워드 제너는 자기가 개발한 우두법 덕분에 곧 천연두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 장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천연두를 정복하기까지는 18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지요. 효과적인 백신이 개발되었는데도 어째서 이렇게나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일까요? 제너가 최초로 우두법을 개발했던 당시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신 접종을 통해서 감염성 질병을 정복하려면 전세계 인구 대부분을 접종해야 하는데, 19세기 초에 백신을 대량 생산해서 세계 곳곳에 공급하고 접종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영국의 시골 의사였던 제너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제너가 만들었던 방식으로 제조된 백신은 열대의 더운 기후에서는 오래 보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미생물과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게 되고 각종 실험 기법이 발전하고 오래 보관 가능한 백신이 개발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백신 접종 캠페인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신 접종 기법 자체도 발전했습니다. 제너가 개발한 우두법 이후로 오랫동안 피부에 작은 상처를 내어 접종하는 방법을 사용했었는데, 1967년에 양갈래 바늘을 사용하는 기법이 개발되어 훨씬 효율적인 접종이 가능해졌습니다. 글 상단에 삽입된 사진에 보이는 특이하게 생긴 바늘입니다. 바이러스 용액을 머금은 이 양갈래 바늘을 팔뚝에 여러번 찔러 접종합니다. 그렇게 여러가지 기술이 개발되고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세계보건기구는 천연두 박멸 프로그램(Smallpox Eradication Program)이라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역사상 유례없는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천연두 백신 접종을 받으러 줄을 선 사람들


현재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천연두 바이러스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극히 일부 실험실에 냉동된 상태로만 존재할 뿐이지요. 천연두 박멸을 선언한 1980년 이후로 대규모 백신 접종도 멈췄습니다. 다만 천연두 바이러스가 생화학 무기로 사용될 가능성에 대비해 세계보건기구가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일정량의 백신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유사시에 추가로 백신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프랑스, 독일, 일본, 뉴질랜드, 미국 등 나라들도 수천만 명 분의 백신을 보관 중이고요. 이런 위험성조차도 없애기 위해서 실험실에 존재하는 마지막 천연두 바이러스까지 모두 폐기해야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아직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천연두의 뒤를 이어 박멸 소식이 들려올 가능성이 제일 높은 감염병은 무엇일까요? 현재로서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은 소아마비입니다. 소아마비는 폴리오바이러스(Poliovirus)에 감염된 어린이에게 주로 나타나는데 감염되더라도 대부분은 증상 없이 지나가지만 200명 중 한 명 꼴로 중추신경계가 감염되면 마비 증상을 겪게 됩니다. 대부분 마비는 다리에 나타나지만 간혹 호흡에 필요한 근육이 마비되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다리에 나타난 마비는 평생의 장애로 이어지고요. 20세기 초에는 전 세계 어린이 대부분이 감염되었다고 할 정도로 폴리오바이러스가 널리 퍼져서 매년 어린이 수십만 명이 소아마비로 목숨을 잃거나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1988년 시작된 소아마비 박멸을 위한 글로벌 프로젝트 GPEI(Global Polio Eradication Initiative) 덕분에 오늘날 소아마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질병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4년 이후로 단 한 명의 어린이도 소아마비에 걸리지 않았으며 2000년에 공식적으로 세계보건기구로부터 소아마비 박멸국으로 인정받았습니다. 



GPEI가 소아마비 감염을 99퍼센트 이상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둔 데에는 역시 대규모 백신 접종이 핵심이었습니다. 소아마비 백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955년 조너스 소크(Jonas Salk)가 개발한 사백신(inactivated poliovirus vaccine)과 1961년 앨버트 세이빈(Albert Sabin)이 개발한 생백신(oral poliovirus vaccine)입니다. 사백신은 열을 가하거나 약품처리를 해서 죽인 폴리오바이러스를 사용한 백신을 말하고, 생백신은 독성을 떨어뜨린 살아있는 폴리오바이러스를 사용한 백신입니다. 생백신은 천연두 백신에서처럼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접종해서 몸 속에서 증식한 바이러스가 면역반응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렇게 한번 만났던 약화된 폴리오바이러스를 기억하고 있는 면역계는 나중에 진짜 폴리오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왔을 때 신속하게 대응해서 소아마비에 걸리지 않도록 해줍니다. 소아마비 생백신의 가장 큰 장점은 먹는 백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먹는 백신은 전문의료인이 접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대규모 백신 접종 캠페인, 특히 의료환경이 열악한 지역에서 아주 쓸모가 많았습니다. 소아마비 사백신은 주사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의료인이 접종해야만 합니다. 또한 생백신을 접종 받은 사람은 몸에서 증식한 바이러스를 배출하기 때문에 접종을 받지 않은 다른 가족구성원들까지 간접적으로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면역을 얻게 되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다만 생백신은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사용하는만큼 바이러스가 증식하는 과정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독성이 강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생백신에 사용하는 바이러스는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독성을 떨어뜨려 소아마비를 일으키지 않도록 만든 것인데 돌연변이를 일으켜 다시 소아마비를 일으킬 수 있는 바이러스로 변해 버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백신 접종 때문에 소아마비에 걸릴 확률은 백만 명 중 두세 명 정도로 극히 낮지만 수억 명의 어린이에게 접종하는 대규모 캠페인에서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위험입니다. 사백신은 죽은 바이러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돌연변이 걱정이 없습니다. 다만 가격이 생백신의 수백 배 이상 비싸고, 한 번의 접종으로는 충분한 면역을 얻지 못하므로 여러차례 접종해야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접종이 간편한 소아마비 생백신


생백신과 사백신의 장점과 단점이 뚜렷이 갈린 탓에 20세기 중반 소아마비 백신 경쟁이 불타오르던 시절부터 오랫동안 생백신이냐 사백신이냐 하는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사실 정답은 "둘 다 쓴다"입니다. 특히 소아마비 발병이 99퍼센트 이상 줄어들어 박멸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는 백신 접종이 갖는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더욱 생백신과 사백신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아직까지 폴리오바이러스가 남아있는 일부 지역에서도 요즘엔 소아마비 발병이 워낙 크게 줄어들어서 정말로 소아마비를 박멸하기 위해서는 생백신 접종 후 돌연변이로 인해 독성을 갖게 된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졌습니다. 사백신보다 효과가 뛰어난 생백신을 접종하되, 생백신 접종 전에 사백신을 접종함으로써 백신 때문에 오히려 바이러스가 퍼져 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미 소아마비가 자취를 감춘 지역에서는 생백신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사백신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때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천연두와 소아마비를 극복해낸 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다양한 분야의 인류 문명의 성과가 집약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생물학이 발달함에 따라 어떤 감염병이 어떤 병원균에 의한 것인지, 이 병원균은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이해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면역학이 발달함에 따라서는 병원균에 면역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이해하고 백신을 개발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지요. 세포배양 등 실험기법이 발달한 것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감염병을 연구하려면 제일 먼저 실험실 환경에서 병원균을 살려둘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바이러스를 배양세포에 감염시켜 키우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원숭이에 폴리오바이러스를 주입해서 연구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원숭이를 희생해야 했을 뿐 아니라 매우 비싸고 더딘 실험이었겠지요. 1949년에 폴리오바이러스를 배양접시에서 키우는 방법이 개발되고 나서야 백신 개발에 속도가 붙게 됩니다. 이렇게 바이러스를 효율적으로 배양하는 기술은 장차 백신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대량생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백신을 개발하고 대량생산까지 해내더라도 제대로 접종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두군데 캠페인만으로도 안됩니다. 전세계적인 대규모 백신 접종 캠페인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국제협력과 행정능력, 그리고 전세계 시민들의 협력도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감염병을 박멸하는데까지 가려면 광범한 백신 접종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천연두 박멸 프로그램 초기에는 세계각국에서 대규모 백신 접종 캠페인을 벌이는데 주로 힘썼지만 전세계인의 80%까지 백신 접종을 하더라도 감염의 고리를 끊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염자를 찾아내고 감염자와 접촉한 모든 사람에게 백신을 접종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나서야 효과적으로 감염을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기 위해 정보를 제공하고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활동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의료시설 뿐 아니라 교육과 정보시스템 및 교통 통신 기술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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