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물리학이 말하는 것처럼 우주의 초기 조건에 따라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지금 이 글자를 보는 화면의 백만개 픽셀마다 색깔이 바뀌는 것이 우주의 초기 조건에서 정말로 결정되어 있다고? 거기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우주의 초기 조건에 모두 욱여넣어져 있었다고?
다르게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물리학자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가능한지 어떤 일이 불가능한지를 따져보자고, 그리고 가능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물리학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키아라 말레토(Chiara Marletto)가 한 질문에 저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컴퓨터가 과거에 한,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계산만으로는 컴퓨터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계산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주의 초기 조건에 컴퓨터가 할 계산이 모두 결정되어 있다면, 컴퓨터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열, 일, 정보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물리학을 키아라 말레토가 당장 제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와 다른 방향으로 첫 발을 내딛는 용감한 사람이 있어야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겠지요.
2021년에 출간된 키아라 말레토(Chiara Marletto)의 책《The Science of Can and Can’t》의 맨 앞부분을 아래처럼 번역했습니다.
《The Science of Can and Can’t—A Physicist’s Journey Through the Land of Counterfactuals》 by Chiara Marletto (Viking, 2021)
솔개가 사냥감을 찾듯이 하늘로 높이 올라서, 이미 알려지고 앞으로 알려질 지식의 영역을 내려다 본다면 아주 이상한 것, 즉 과학이 지금까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거의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을 눈치챌지 모른다. 이 무시당한 것들은 일상 생활의 수준에서도, 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현상의 수준에서도 물리적인 현실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과학의 기본적인 설명에 이들을 포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다. 이들은 ‘실제로 있는’ 것과 관련한 사실이 아니라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은’ 것과 관련한 사실이다. 실제로 있는 사실과 구분하기 위해 이것을 “반(反)사실(counterfactual)”이라고 부르겠다.
미래의 우주 탐사에서 다른 행성계의 외계 행성을 방문해서 녹슬지 않는 금속 상자 안에 다른 물건들과 함께 예를 들어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을 남겨두었다고 치자. 그 시집이 다른 물건들과 함께 그 행성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적인(factual)’ 성질이다. 그 시집의 단어가 읽힐 수 있다는 것은 반(反)사실적 성질이고, 이것은 미래에 누군가가 그 단어들을 읽든지 말든지와 상관없이 진실이다. 그 금속 상자는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 단어들이 읽힐 수 있다는 것은 진실이고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다른 문명이 그 행성을 방문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문명의 수준을 의미한다.
반(反)사실적 성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사실적인 성질과 어떻게 다른지 보기 위해 화면에 숫자 ‘0’을 여럿 표시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생각해 보자. 이것은 이 컴퓨터의 사실적인 성질이고 이 컴퓨터의 현재 상태와 관련이 있다. 다른 숫자나 문자를 표시하도록 이 컴퓨터를 재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컴퓨터의 반(反)사실적 성질이다. 그런 일을 하도록 이 컴퓨터를 재프로그래밍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컴퓨터의 본질적인 성질이다. 그럴 수 없다면 이것을 컴퓨터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물리학에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반(反)사실은, 물리적인 시스템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일어나게 할 수 없는가와 관련된 사실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이 가능한지 아니면 불가능한지와 관련한 사실이다. 반(反)사실은 물리 법칙—우주의 모든 시스템을 지배하는 규칙—의 본질적인 특징을 나타내기 때문에 근본적이다. 예를 들어 물리 법칙에 따른 반(反)사실적 성질은 영구 기관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영구 기관이란 단순히 한 번 시작한 운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기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구 기관은 쓸모 있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영구 기관이 존재한다면 다른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영구 기관을 사용한다면, 어떤 형태의 연료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가 영원히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다른 에너지 원을 사용하지 않고, 에너지가 없는 어떤 것을 에너지를 지닌 어떤 것으로 바꾸는 변환은 우리 우주에서 불가능하다. 물리학자들이 에너지 보존 원리라고 부르는 근본적인 법칙 때문에 이런 일은 일어나게 할 수 없다.
물리적인 시스템의 중요한 반(反)사실적 성질 중 하나는 증기 기관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열역학의 중심에 있다. 증기 기관이란 한 형태의 에너지를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이고, 에너지 보존 원리를 거스르지 않고도 피스톤을 움직이는 것 같은 쓸모있는 일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제작되었던 증기 기관은 우리 우주의 사실적인 성질이다. 최초의 증기 기관이 제작되기 훨씬 전에 증기 기관을 제조할 수 있었던 가능성은 반(反)사실이다.
물리학에 나타나는 반(反)사실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형태가 있다. 하나는 (예를 들어 영구 기관처럼) 어떤 변환의 불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예를 들어 증기 기관처럼) 어떤 변환의 가능성이다. 둘 다 물리 법칙의 근본적인 성질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과 중요한 관련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천재적인 생각을 해도 물리 법칙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변환을 일으킬 수 없다, 예를 들어 영구 기관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열심히 궁리해서 가능한 변환을 일으키는—예를 들어 증기 기관을 제작하는—다른 방법이나 더 좋은 방법을 알아낼 수 있어서 점점 개선할 수 있다.
주류의 과학적 세계관에서 물리적 시스템의 반(反)사실적 성질은 부당하게 2등 시민으로 취급되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왜? 심각한 오해 때문이고, 이 오해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속한 분야, 이론 물리학에서 비롯되었다. 물리적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모두 밝히고 거기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모두 설명하면, 즉 사실적인 것들을 모두 설명하고 나면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설명했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가? 그럴 법하다. 근거가 불확실한 가정들을 여럿 받아들였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컴퓨터가 무엇인지 말하려면 실제로 수행한 계산들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컴퓨터가 무엇인지 말하려면, 가능한 방법으로 프로그래밍되었을 때, 컴퓨터가 수행할 수 있는 가능한 계산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면, 실제로 발생한 선박 침몰만으로는 왜 선박에 구명정이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구명정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선박이 침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반(反)사실적 설명이다. 그 선박이 한 번도 침몰한 적이 없다고 해도 그렇다!
반(反)사실을 근본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도 과학은 지금까지 쉼없이 발전해 왔다. 예를 들어, 기초 물리학에서는 양자 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일방 상대성 이론 같은 새로운 이론들이 나왔고, 생물학에서는 유전학이나 분자 유전학으로 새로운 설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반(反)사실을 무시하고,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만 과학에서 근본적인 설명을 구성해야 한다는 가정은 어떤 과학 분야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 과학에서 현재 어렴풋하게 설명하거나 전혀 설명하지 않는 어떤 것들을 설명하려면 반(反)사실은 필수적이다. 열, 일, 정보(고전적 정보와 양자 정보 모두)에 관한 정밀하고 통일된 이론을 찾아내려면, 살아있는 것들에서 보이는 디자인을 설명하려면, 그리고 지식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면 반(反)사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 책에서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정보, 열, 일 등을 지금처럼 물리학에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더 근본적인 양자 역학이나 상대성 이론과 달리 정보, 열, 일에 대한 현재 물리학의 설명은 근사적일 뿐만아니라 완전한 설명에 이르지도 못했다. 이런 것들을 근사없이 정밀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기초 물리학에서 시작해서, 생물학, 컴퓨터 과학, 인공 지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이해하는 데 반(反)사실은 필수적이다.
이 책은 반(反)사실의 대륙으로 떠나는 탐험 여행이다. 물리학의 전통적인 개념이 설정한 경계를 벗어난 영역의 그림을 그릴 것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금지된 해역으로 들어가는 탐험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떠난 것처럼, 다양한 동물과 생명체가 있는 낯선 땅을 탐사하면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기록할 것이다. 여행을 마칠 때에는 반(反)사실에 어떻게 접근할지,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는데 반(反)사실이 어떻게 열쇠가 되는지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얻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높은 장벽 때문에 그 동안 우리가 그런 문제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과, 현재 물리학과 과학이 전진하지 못하는 분야들의 중심에 반(反)사실적 성질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과, 이것들을 물리학과 과학에 통합하려면 그 장벽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보이기 위해, 물리학에서 중요하지만 미해결인, 하지만 반(反)사실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문제를 보일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현상인 정보—고전적 정보와 양자 정보—에서 시작해서 생명의 이론, 지식의 이론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열역학을 검토할 것이다. 이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 물리학은 이들을 근사적으로밖에 다루지 못하지만, 반(反)사실에 바탕한 과학은 이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하고 이들 사이에 예상하지 못한 관련을 드러낼 것이다.
또한 반(反)사실에 관한 새로운 과학 이론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질지를 설명할 것이다.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설명 방식을 제안할 것이고, 이것을 “가능과 불가능의 과학(Science of Can and Can’t)”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렇게 반(反)사실에 바탕해서 과학에 접근하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극적으로 바뀔 수 있고, 더 선명하고 더 강력한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다. 이 놀라운 단계를 넘어가면, 수백년 동안 숨겨진 비밀을 풀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