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원용 Aug 05. 2016

"시간은 흐르고 자유 의지는 존재한다"

점심에 밥을 먹을지 국수를 먹을지 선택할 수 있는가?

세상에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주류 물리학은 상식과 반대로 답합니다. 주류 물리학이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가 펼쳐져서 얼어붙은 우주, "블럭 우주", 시간이 흐르지 않는 우주에 따르면 거기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http://newspeppermint.com/2015/01/04/m-time/ "물리학자에게 '해피 뉴 이어'는 어떤 의미인가")


블록 우주에 반대하는 물리학자들이 있습니다, 리 스몰린이나 니콜라스 지생처럼. 저도 이쪽 편입니다.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하건 내일이 결정되어 있다고 믿어야 할까요?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제가 누구 편을 들든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겠지만.


니콜라스 지생 교수가 New Scientist에 쓴 글을 아래처럼 번역했습니다. 지생 교수의 책 “양자우연성”(승산, 2015)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http://www.newscientist.com/article/mg23030740-400-physics-killed-free-will-and-times-flow-we-need-them-back/

물리학이 부정했던 자유 의지와 시간의 흐름을 다시 살려야 한다


니콜라스 지생(Nicolas Gisin)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본질이라고 느끼는 것을,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널리 알려진 말로 이렇게 요약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생각이 통과하는 수동적인 세탁기인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인가?


이 질문을 할 수 있으려면 이미 둘째 해석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근대 과학–특히 근대 물리학–은 한 목소리로 첫째 해석의 편을 든다. 한 사건이 필연적으로 다음 사건으로 이어지는 결정론적인 우주에서 자유 의지라는 개념은 환상일 뿐이다.


나는 이것을 거부한다. 내가 보기에, 과학의 틀을 세우는데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다. 자유 의지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오늘날의 물리학에서 뚜렷하게 빠져있는 다른 것, 우리가 아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집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덜 알려진 19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쥘 레퀴예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 의지가 없다면, 과학적 진리에 대한 믿음은 환상일 뿐이다.” 여러 주장 중에서 어떤 것이 믿을만한지 판단하고 다른 것을 버리려면, 즉 과학적 활동을 하려면 자유의지가 필수적이다.


그러니 과학적 진실을 추구해서 이른 결론이 ‘자유의지가 없다’라면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이것은 뉴턴과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비롯되었다. 태양계 행성 운동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온 우주가 시계처럼 작동한다고, 결정론적인 이론으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미 어제 시작되어 있었고, 빅뱅의 초기 조건에서 사실 결정되어 있었고, 정말로 새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나는지 아닌지를 정할 방법이 없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때문에 더 헷갈리게 되었다. 결정론적인 우주와 맞추기 위해 “블럭 우주”라고 부르는 그림이 제시되었다. 여기서는 자유 의지뿐만이 아니라 흐르는 시간도 포기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거대한 하나의 블록에 얼어붙어 있다. 생각의 자유를 누리는 현재도 자유 의지처럼 환상일 뿐이다.


그래서 과학철학자들은 거꾸로 왜 우리가 자유 의지가 있다고 느끼는지를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결정된 필연적인 미래에 대응하는 선택을 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따라서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느끼더라도 그 느낌은 착각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말장난이다. 레퀴예를 다시 인용하면 “자유 의지가 확실한지 묻지 말고, 확신하려면 자유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자.”


오래 궁리한 끝에,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내가 믿는 것을 찾았다. 세계를 묘사하는 수학이 너무 세밀한 것이 문제이다. 꼭맞게도 이 문제는 다시 데카르트에게 돌아간다. 데카르트는 1, 2, ¾, 1.797546… 등 과학에서 사용하는 수에 “실”수(“real” number)라는 이름을 붙였다. -1의 제곱근을 사용하는, 실제 세계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허수와 구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수학의 “실”수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가? 절대로 아니다. 거의 모든 실수는 숫자 끝없이 나열 것이다. 거기에는 무한한 양의 정보가 들어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언어로 물을 수 있는 모든 질문의 답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한한 시공간에는 유한한 정보밖에 담을 수 없다. 따라서 입자의 위치, 장(field)의 세기, 유한한 부피의 양자 상태 등은 “실”수일 수가 없다. “실”수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괴물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실수의 숫자들은 마구잡이여서, 그 다음 숫자를 계산할 수 없다. 마구잡이 숫자 묘사되는 우주에 살고 있다면 우주가 결정론적이라고 믿기 어려울 것이다.  


실수는 자연을 묘사하는 결정론 모델에 아주 쓸모가 있다. 그러나 결정론 모델을 채택하는 것이 자연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상태가 있는 고전적인 혼돈 시스템으로, 비오는 날과 맑은 날이 있는 날씨 시스템을 생각해 보자. 어떤 모델이 시작점으로 사용한 수의 소수점 아래 천번째 자리수에 따라,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비오는 상태와 맑은 상태의 지속 시간이 결정된다고 예측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소수점 아래 천번째 자리수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자 엘리자베스 앤스콤이 1971년에 이렇게 말했다. “뉴턴의 천문학의 위대한 성공은 한편 지성적인 재앙이었다. 뉴턴의 천문학 때문에 착각하게 되었다. … 과학적인 설명의 이상적인 형태를 얻은 것 같았지만, 진실은 그 관측 자료를 얻는 동안 태양계의 일부가 아주 평온했기 때문에 그런 모델이 나왔다는 것이다.” 태양계, 시계, 조화 진동자처럼 겉보기에 결정론적인 시스템은 예외이고 지루하다. 혼돈, 양자 측정, 그리고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생명이 일반적인 규칙이고 흥미진진하다.


창조적인 시간

무한히 정밀한 수치적 묘사 때문에 속기 쉽지만 우주가 그렇게 정밀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마구잡이 변동이 어느 정도 운명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고, 과학이 자유 의지와 모순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과학이 자유 의지를 설명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자유 의지 때문에 우리가 과학을 믿을 수 있다. 수학적 공리에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자유 의지에도 설명이 필요없다.


자유 의지를 인정한다는 것이 우리가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자유 의지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지 않는다. 자유 의지는 다만 이미 존재하는 가능성 중에 어떤 것이 실재로 일어나게 되는지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이것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양자 이론의 “코펜하겐” 해석과도 통한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측정하는 행위가, 양자계를 묘사하는 파동 함수를 미리 정해진 여러 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로 “붕괴”시킨다. 양자 이론은 무작위적이고 비결정론적이지만 결정된 세계를 만들어내고, 이것은 자유 의지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와 충돌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시간을 더 높은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시간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순서를 나타내는 단순한 매개 변수가 아니다. 필연적이지 않은 어떤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시간이 있고, 그 일이 벌어진 다음에도 시간이 있고, 이 두 시간은 같지 않다. 양자 측정의 결과처럼 필연적이지 않은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매개 변수로 설명할 수 없는 정말로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을 나는 “창조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과학으로는 이것을 거의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블록 우주를 낳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양자 중력 이론이 대치하는 미래의 물리학에서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자유 의지는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과학은 헛소리이다.


글쓴이

니콜라스 지생은 스위스 제네바대학교에서 양자 통신과 양자 암호화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이다. 2003년에 지생의 연구진은 최초로 원거리 양자 원격 전송에 성공했다. 시간과 자유 의지에 관한 그의 생각을 arxiv.org/abs/1602.01497에서 더 볼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연결된 정신: 개인이라는 지어낸 이야기를 버릴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