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로 ‘난쟁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나노(nano)’는 길이나 시간이 10억분의 1만큼 작은 것을 나타냅니다. 얼마나 작은지 한 번 살펴볼게요. 지름이 12,700㎞인 지구를 10억분의 1로 줄이면 완두콩 한 알 정도의 크기가 돼요. 만약 지구가 1m 크기로 줄어든다면, 완두콩은 얼마나 작아지게 될까요? 이때의 완두콩의 크기가 바로 1㎚(나노미터)입니다.
나노기술은 사람의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물질세계를 다룹니다. 20세기 후반, 원자나 분자까지 관찰할 수 있는 고성능의 현미경이 나오면서 우리는 비로소 나노 세계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 나노기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최신 나노기술이 고대에도 활용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요?
고대 로마 사람들은 뛰어난 유리공예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600년 전에 제작된 리쿠르고스 잔이에요. 리쿠르고스는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인물로 에도니(Edoni)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로마신화의 바쿠스)를 숭배하지 못하게 합니다. 게다가 디오니소스의 신도인 암브로시아를 박해하여 결국은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지요. 술잔은 이 암브로시아가 덩굴로 변해 리쿠르고스 왕을 감아 죽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어요. 컵 바깥 부분의 장식이 아주 섬세하지요?
리쿠르고스 컵은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의미가 큰 유물입니다. 이 술잔에는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숨어 있기 때문이에요. 빛의 각도에 따라 잔의 색깔이 변하거든요. 빛을 앞쪽에서 쏘면 컵은 진한 옥색으로 보이는데, 빛을 뒤쪽에서 (또는 안에서 바깥으로) 쬐면 반투명한 루비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어떠한 전자 장치도 없는데 말이죠. 빛을 쏘아 컵이 붉은색으로 변하는 모습이 리쿠르고스의 죽음을 더 극적으로 보이게 하지 않나요?
한 컵에서 두 가지 다른 색깔이 나타나는 마법 같은 현상은 1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습니다. 해답의 실마리는 195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는데요. 과학자들은 컵의 파편을 분석하여 유리 안에 극소량의 금과 은 나노입자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금 나노입자가 붉은색을, 은 나노입자가 녹색을 나타내는 주요 역할을 할 거로 생각했습니다.
물질이 나노 크기로 작아지면 우리의 일반상식과는 전혀 다른 성질들이 나타납니다. 색깔 변화도 그중 하나예요. 보통의 금속은 은처럼 반짝이는 백색을 띠지요? 자유전자라고 불리는 존재 때문입니다. 자유전자는 원자핵의 구속에서 벗어나 물질의 내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금속이 가지고 있는 많은 성질이 바로 자유전자에 의해서 나타나지요. 이 자유전자들이 모든 파장의 가시광선을 흡수했다가 대부분의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 반짝이는 은백색으로 보이게 됩니다. 모든 빛을 혼합하면 흰색이 되니까요. 금속마다 자유전자가 흡수하거나 반사하는 파장이 달라요. 그래서 구리나 금처럼 특유의 색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금속 입자가 빛의 파장보다 훨씬 작은 크기가 되면, 나노입자는 가시광선 영역의 특정 파장을 흡수해서 고유한 색을 띠게 됩니다. 특히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 나노입자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지요. 예를 들어, 100nm 미만의 금 나노입자는 녹색 영역의 가시광선을 강하게 흡수하게 됩니다. 앞서 모든 빛이 합쳐지면 흰색이라고 이야기했었지요? 백색광에서 녹색광이 빠지면 보색에 해당하는 적색광이 반사되기 때문에, 우리 눈에 붉게 보이는 것입니다. 흡수/반사가 일어나는 가시광선의 영역은 금속의 종류마다 다르고, 같은 금속이라도 나노입자의 크기나 모양에 따라서 색깔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중세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러한 금속 나노입자의 광학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지요.
빛을 쏘는 각도에 따라 다른 색이 나타나는 현상을 이색성(二色性)이라고 합니다. 리쿠르고스 컵의 이름을 따서 리쿠르고스 효과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걸까요? 1980년대 후반에 추가로 이루어진 연구에 따르면, 리쿠르고스 컵의 유리에 존재하는 나노입자는 금과 은이 3:7 비율로 섞인 합금이었습니다. 약 10% 정도의 구리도 포함하고 있었고요. 그 당시 연구를 수행했던 과학자들은 이 합금 나노입자가 컵의 이색성에 기여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2010년 이후의 연구들은 다른 가능성도 보여줍니다. 순금속이라도 나노입자의 모양과 크기에 따라 이색성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거든요.
리쿠르고스 컵의 제작 방법에 관한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아서, 우리는 어떤 주장이 진실인지 직접 알기 어렵습니다. 정확하고 정밀한 조사를 하려면 소중한 유물을 부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고대 로마인들이 나노입자를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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