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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과학 Jun 16. 2021

인공 혈액 - 생명력의 상징인 피, 대체가 가능할까?


피를 바꾸면 성격도 달라질까?


1667년 프랑스의 의사, 장-바티스트 드니(Jean-Baptiste Denis, 1640~1704)는 아주 위험한 시도를 합니다. 어린 송아지에게서 뽑은 피를 한 남성의 혈관에 주입했던 것입니다. 그 남성이 피를 많이 흘려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4체액설이 의학계의 정설로 통했던 당시에는 피에 생명체의 특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성은 폭력적인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이에 얌전한 송아지의 피를 주입하면 그 증상이 완화되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히 말도 안되는 논리지만 당시 이 시도의 결과는 성공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송아지의 피를 주입받은 사람은 심각한 수혈부작용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그로 인해 폭력을 휘두를 기운조차 없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난 건 아주 예외적인 행운일 뿐이었습니다. 이후의 수혈 시도들은 동물 대 사람이건, 사람 대 사람이건 간에 너무 많은 희생자들을 낳았고, 수혈은 이내 의료계에서 완전히 금기시되기에 이릅니다. 






근대적 수혈의 시작


수혈이 본격적인 의료행위가 될 수 있었던 건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의 공이 절대적이었습니다. 1901년 란트슈타이너는 여러 환자들에게서 채혈한 피를 섞어보는 과정에서 우연하게도 어떤 경우에는 피들이 서로 반응해 적혈구가 모조리 터지거나 엉겨붙지만, 다른 경우에는 아무 일도 없음을 발견하였고, 눈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피에도 사실은 종류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발견한 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ABO 혈액형 구분법입니다. (란트슈타이너는 이후 1940년에 Rh식 혈액형도 발견합니다). 


  

하지만 혈액형을 알아내어 수혈의 안전성이 대폭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혈 기법은 의료현장에서 널리 쓰이지 못했습니다. 피가 지닌 독특한 성질, 즉 혈관 밖으로 유출되는 즉시 굳기 시작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20세기 초까지도 수혈이 필요한 환자와 공여자의 혈관을 직접 연결해서 피를 주입해야 했기에 골든타임에 맞춰 공여자를 찾기도 어려웠고, 수혈량을 통제할 수 없어서 공여자에게 위험할 정도로 피를 많이 뽑은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수혈은 1910년대 항응고제의 일종인 시트르산염이 개발되면서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1936년에는 미국 시카고에 세계 최초의 혈액은행이 창설되었습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수혈팩의 보급이 병사들의 사망률을 낮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알려지게 됨으로써 헌혈과 혈액은행, 그리고 수혈은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나눔의 행위로 자리잡게 됩니다. 





피가 부족해!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의 홈페이지에는 매일매일 그날의 혈액 보유현황이 공지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6월 11일 현재, 혈액 보유량은 O형 3.7일분, A형 4.0일분, B형 5.6일분, AB형 5.8일분으로 평균 4.5일분에 불과합니다. 보통 비축량이 5일분 미만이면 혈액수급 부족 징후가 시작되었다고 여기는데, 이미 그 상태에 들어선 것이죠.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2019년 발표된 미국 워싱턴대학 연구팀의 연구에 의하면, 2017년 기준 전세계 195개국 중 무려 119개국에서 혈액 수급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대개 수혈이 필요한 경우는 과다출혈로 인해 생사가 분 단위로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기에, 수혈용 혈액의 부족은 살릴 수 있는 수많은 생명을 눈앞에서 놓치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출처 :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 (https://www.bloodinfo.net) 캡처




 속에서 피가 하는 다양한 


인체 내에서 피는 매우 다양한 역할을 합니다. 피는 독립된 세포로 구성된 혈구(적혈구백혈구혈소판)들이 액체 성분인 혈장에 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혈액 속 혈구와 혈장의 비율은 대개 45:55의 비율을 유지하지요. 적혈구는 산소를 운반하고, 백혈구는 면역반응을 담당하며, 혈소판은 혈액 응고 기능을 담당합니다. 혈장은 이들 혈구들이 혈관을 타고 원활하게 흘러다닐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다양한 단백질과 무기질, 영양분, 호르몬들을 녹여서 이동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피를 구성하는 다양한 성분 중에 가장 먼저 인공적 합성이 유도된 것은 적혈구입니다. 대개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경우 가장 큰 이유가 적혈구 부족이거든요.  


적혈구는 보통 혈액 1mm³에 500만개쯤 들어 있는데 성인의 평균 혈액량을 5리터로만 잡아도 한 사람이 가지는 적혈구의 수는 25조(兆)에 이른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성인의 몸 전체의 세포 수가 약 37조 정도이니 적혈구는 우리 몸의 세포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세포입니다. 이렇게 적혈구의 수가 많은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이 산소 운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들은 포도당을 다양한 생화학적 경로를 통해 분해하여 세포내 에너지원인 ATP를 얻어내어 살아갑니다. ATP가 자동차를 움직이는 연료라고 한다면 포도당은 이 연료를 담아놓은 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당 연료통의 뚜껑은 매우 단단해서 열기 위해서는 망치가 필요한데, 그 망치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산소입니다. 산소가 없으면 포도당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 몸의 세포는 ATP를 추출할 수 없고, ATP는 실시간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저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몸은 끊임없이 산소를 필요로 하고, 그 산소를 운반하는데 필요한 적혈구가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이에 현재 연구되고 있는 인공 혈액 분야의 가장 큰 갈래는 적혈구 대용 제제(red blood cell substitute)입니다. 






 속에서도 숨 쉴  있다?


우리가 물에 빠졌을 때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익사하는 것은 물 때문이 아니라, 물에 산소의 양이 적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태아 시절 ‘양수’라는 일종의 액체 속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기에 물 속에서 사는 것이 꼭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깨끗한 물이어야 합니다. 물이 더러우면 폐렴에 걸릴 수 있습니다.) 물고기들은 물 속에서 아무 문제없이 산소호흡을 하며 삽니다. 하지만 물고기의 아가미와 달리 사람의 폐는 물 속에 녹아 있는 적은 양의 용존 산소 속에서 산소를 추줄하는 기능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물이 아니라 산소가 문제라면 물 속에 산소가 대기 중과 비슷한 농도(약 20%)로 존재한다면 숨 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죠.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은 과불화탄소의 일종인 플루오로데칼린(Fluorodecalin)이라는 물질로, 대기 중 산소 농도인 21%를 넘어 최대 45%까지 산소를 녹일 수 있는 액체입니다. 이에 과학자들은 비이커에 플루오로데칼린을 가득 넣고 (불쌍한) 실험쥐를 안에 빠뜨렸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by Kenneth C.Lowe. J.Mater.Chem.,2006,16,4189-4197 (CC BY-NC-SA 2.0 KR 나무위키)


물과 비슷하게 투명한 액체 속에 푹 잠긴 쥐는 익사하는 대신 액체 속에서 호흡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과다출혈이 위험한 일차적 이유가 단지 산소 부족이라면 산소를 가득 담은 액체인 플루오로데칼린이 대체 혈액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공혈액에 대한 시도는 이렇게 화학적인 접근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플루오로데칼린을 중심으로  과불화탄소 계열의 인공혈액은 이후 시험적으로 조산아의 호흡 보전 등에 시도되기도 하였으나 혈액을 대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과불화탄소류의 화학물질들은 물에 섞이지 않아 원래 물이 상당량을 차지하는 혈액의 다른 구성성분들과는 어울리기가 어려운 데다가 혈관을 자극해 혈압을 지나치게 올리는 역할을 하기에 이들을 효과적인 혈액 대체제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붉은 파란 초록 


산소 운반 능력이 중요하다면 꼭 살아있는 적혈구 전체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적혈구에서 산소를 운반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헤모글로빈에 주목합니다. 헤모글로빈은 적혈구 속에서 산소 운반에 관여하는 혈색소로 붉은색을 띠는 철분과 단백질이 결합한 화합물이며 분자식은 C₃₀₃₂H₄₈₁₆O₈₇₂N₇₈₀S₈Fe₄ 입니다. 참고로 헤모글로빈에 포함된 4개의 철 원자가 붉은 피의 원인이 되는데 철 원자 1개마다 한 분자의 산소가 결합할 수 있으며 산소와 결합된 산화철은 붉은색이 됩니다. 적혈구 1개 당 헤모글로빈 분자가 약 2억 8천만개쯤 들어 있으므로 적혈구 1개는 무려 10억개가 넘는 산소분자를 운반하는 셈이지요. 참고로 혈색소로 사용하는 물질은 종에 따라 달라서 산소운반체로 헤모글로빈이 아닌 구리와 결합된 헤모시아닌을 가지면 피는 평소에 무색투명하지만 산소와 결합했을 때엔 산화구리의 색인 파란색이 되며, 클로로크루오린이나 빌리베르딘을 혈색소로 가지는 경우에는 피가 초록색을, 헤메리트린을 가지면 보라색을 띠게 됩니다. 




적혈구 대신 산소를 운반하라


어쨌든 헤모글로빈은 적혈구가 지닌 산소운반능력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꼭 적혈구 전체가 아니라 헤모글로빈만 있어도 산소 운반 자체는 가능하죠. 그래서 적혈구가 없는 혈액대체제로 헤모글로빈 기반의 산소운반체(Hemoglobin-Based Oxygen Carriers : HBOCs)가 고안되었습니다. 혈액형 타입에 따라 수혈이 제한될 수 있고, 보관 시 반드시 냉장 시설이 필요하고 그래도 3~6주를 넘기기 못하는 사람의 피에 비해 HBOCs는 혈액형과 상관이 없기에 누구에게나 투입이 가능하고, 실온에서 1-3년까지 활성이 유지되는 등의 장점을 가집니다. 이후 여러 생명공학회사들이 다양한 HBOCs를 개발했고, 일부는 FDA의 임상시험 허가도 얻었으나, 아직 실제 의료현장에서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헤모글로빈 분자 자체는 혈관을 수축시키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는데 인체에서 필요로 하는 헤모글로빈의 요구량이 워낙 많은지라 이 부작용이 때때로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헤모글로빈을 일종의 생체막으로 감싸 혈관에 대한 직접 노출을 막는 방법 등 다양하게 개선된 HBOC 등이 개발되었으나 아직은 일부 군사용으로만 이용될 뿐 널리 이용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인공혈액을 위한 또다른 시도


사실 HBOCs 제제는 혈액의 역할을 일부 대신할 수는 있지만 인공 혈액이라 부르기엔 여전히 부족합니다. 혈액은 산소 운반 외에도 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줄기세포를 이용한 혈구세포의 분화입니다. 뼈 안쪽에 위치한 골수에는 조혈모세포 있어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 등의 혈구세포를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조혈모세포는 혈구 형성 능력이 매우 뛰어나 매시간 100억개에 달하는 적혈구를 만들어냅니다. (동시에 그 숫자만큼의 적혈구가 비장에서 파괴되고 재흡수됩니다.) 만약 조혈모세포를 통해 혈구를 실험실에서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혈구세포들을 수분과 단백질 등을 섞어 만든 인공혈장에 섞어준다면 거의 완벽한 혈액이 됩니다. 게다가 이들은 화학적 제제가 아니라 우리 몸이 만들어내는 생물학적 제제를 그대로 실험실에서 재현한 것이기 때문에 기능만을 대신하는 대체혈액이 아닌 완벽한 인공혈액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술은 20세기 후반부터 시도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체외에서 조혈모세포의 활성을 조절하기 어렵고, 적혈구로써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적아세포들이 많이 생성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해 아직은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7년 Nature 지에 실렸던 ‘기증자 없는 바이오엔지니어링’이라는 글은 우리에게 여전히 혈액은행이 필요하고 당분간 이런 상황은 계속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유도만능줄기세포(iPS cell)을 이용한 혈구세포의 배양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단지 피가 모자라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없을 때까지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https://www.bloodinfo.net)

· 『인물로 보는 해부학의 역사』, 송창호, 정석출판, 2015

· 『5리터 :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 빌 헤이스 지음/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8

· 「4체액설 : 피, 점액, 황담즙, 흑담즙」, 이재담, 네이버캐스트 생물산책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4551&cid=58943&categoryId=58966

· 「The global need and availability of blood products : a modelling study」, Nicholas roberts etc. THE LANCET, 17 Oct, 2019

· [An estimation of the number of cells in the human body], Eva Bianconi etc. Ann Hum Bio. 40(6), 2014

· 「인공혈액의 현재와 전망-적혈구 대용제제를 중심으로」, 김종훈&이기영, 대한의사협회지 2009년 52권 2호

· 「수혈 위기, 인공혈액으로 극복하나」,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2017

· 「Bioengineering: Doing without donors」, Nature volume 549, pagesS12–S15 (2017)

· 「매일 하루에 2333억개의 적혈구를 만들어내는 줄기세포」, 땡칠이닥터, bric 바이오통신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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