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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과학 Jun 20. 2018

'맞이하는 죽음'이 남긴 숙제

지난 5월 호주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스위스로 특별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바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104번째 생일이던 4월 4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나이까지 살게 된 것을 매우 후회한다”며 “진짜 슬픈 것은 죽고 싶은데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그는 조력자살권을 포함한 완전한 형태의 시민권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나를 기억하려는 어떤 추모행사도 갖지 말라. 시신은 해부용으로 기증해라.” 무신론자인 그가 남긴 유언입니다. 5월 10일 그는 스위스 베른의 한 병원에서 의료진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사량에 해당하는 신경안정제 주사를 맞고 숨을 거뒀습니다. 그는 불치병이 아니라 고령을 이유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과연 그가 선택한 ‘존엄한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숙제를 남겼을까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락사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구달 교수 / 구달 교수의 안락사를 도운 민간단체 exit international의 보도자료(press release)



“이제 삶을 마감할 수 있어 행복하다”


구달은 70년 넘게 생태학 연구에 몸 바친 학계 권위자로 호주 에디스코완대학교의 명예교수로 재직해 왔습니다. 2016년 대학측은 구달의 건강을 이유로 퇴임을 요구했습니다. 102세의 고령인 구달이 1시간30분 거리에 있는 연구실로 출퇴근하기 위해 버스와 지하철을 네다섯 번 환승해야 하는 상황이 염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구달은 ‘고령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라고 항의했습니다. 대학측은 구달에게 “새 연구실을 마련해주겠다”며 퇴임 권고를 철회했지만 이때부터 구달은 생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 기자회견에서 “6년 전부터 시력이 몰라보게 떨어졌고 더 이상 삶을 이어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또 추하게 늙는 것(Ageing Digracefully)이라고 적힌 셔츠를 입은 구달은 “이제 삶을 마감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밝혔습니다. 취재진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노래를 묻자,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를 꼽으며 마지막 소절을 흥얼거리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국가에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는 허용되지만, 독극물 주입처럼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안락사는 스위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일부 국가에서만 허용되고 있습니다. 구달 박사가 조국인 호주가 아닌 스위스를 찾은 것도 호주가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작별의 시간’ 갖는 연명의료결정법


우리나라에서 안락사가 허용된다고 알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호주에서 가능한 것은 안락사가 아니라 존엄사입니다. 존엄사는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환자가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로 연명치료를 중단해 숨을 거두는 행위입니다. 연명치료란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을 통해 생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물과 영양분, 산소, 진통제는 계속 투여돼야 합니다.


이와  달리 안락사는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생을 단절시키는 행위입니다. 의사조력자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위스 형법 제115조는 정신적으로 온전한 자가 자살하는 경우에 사적인 이익이 없이 자살을 도와주는 것은 적법하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살에 대한 ‘의학적 조건’이 없기 때문에 구달처럼 말기 환자가 아닌 경우에도 자살조력이 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자살조력은 민간단체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들 단체는 자살을 도와주기 전 자살을 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숙고했는지를 평가하고, 불치병, 고통을 참을 수 없거나 비합리적인 장애가 있다고 판단하면 자살을 도와줍니다.


자살은 바비츄레이트(sodium pentobarbital)를 치사량으로 섭치하는 방식인데, 환자의 이성적 능력을 확인하고 의학적 상태를 검토해 처방하는 과정은 의료법에 의해 의사가 담당합니다.


우리나라는 말기환자, 임종환자 등을 대상으로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전의료의향서(Advance directives)는 건강한 사람 등 19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연명의료계획서(Physician orders for life-sustaining treatment)는 말기와 임종기 환자처럼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환자가 의사와 함께 작성하면 본인의 뜻에 따라 연명치료 없이 임종하게 됩니다.



연명치료를 중단하자는 논의는 임종기 환자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의학의 힘으로 과도하게 수명을 연장하면서, 정작 환자가 가족과 이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등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기회까지 박탈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습니다. 올해 2월부터 시행되는 ‘연명의료결정법(존엄사법)’이 웰다잉법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19년 만에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테리 월리스


존엄사를 시행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가끔 식물인간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1984년 7월 테리 월리스는 자신이 탄 자동차가 개울의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뒤 19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아칸소주 스톤카운티 재활센터에 입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2006년 6월 갑자기 월리스가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사실 월리스는 3년 전부터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으나 의사들은 지속적인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환자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못 박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문을 열었고, 그 뒤 꾸준히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 말한 단어는 “엄마”였으며, 다음은 “펩시”, “우유” 등의 단어였습니다. 의사들은 사고로 손상된 신경 부위를 대체할 새로운 신경 연결단위들이 두뇌의 자발적 작용으로 생성돼 말을 할 수 있게 됐고, 신체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존엄사를 결정할 때는 환자가 소생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아닌지 과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경우는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 의사를 확인할 방법이 없을 때입니다. 갑작스런 사고나 발병으로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 환자가 사전의료지시를 할 충분한 시간이 없을 때 가족의 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연명의료 중단 결정은 환자의 사전의료지시가 있을 때 가족 2인의 진술이 있거나 사전의료지시가 없으면 환자 가족 전원 합의로 이행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칫 존엄사 허용이 ‘현대판 고려장’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해야 합니다. 환자가 가족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존엄사를 결정하거나 평소 환자의 의사와 다르게 가족들이 환자의 존엄사를 결정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살인’입니다.


앞으로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확대되려면 국제기준에 합당한 의료행위 규정을 만들 뿐 아니라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과 그 가족에 대한 사회적 의식도 함께 성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고령화 사회를 진입해 더 나은 늙음을 준비하듯 자연스럽게 품위 있는 죽음을 대비할 수 있는 사회로 나가야 할 때입니다.





[참고자료]

김장한, (2009), 연명치료중지에 관한 외국의 입법례, 대한의사협회지, 52(9) p856~86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10/2018051003997.htm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011624001&code=970100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568460

http://ansan.kumc.or.kr/popup/popDoctorInfo.do?BOARD_ID=S007&BNO=118&view=Y&cPage=&DR_NO=169&mod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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