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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바깥 Oct 16. 2016

프랑스 서점에서 책을 추천받은 날

Abbey Bookshop에서 David F. Wallace를 만나다

 어제는 돈을 아끼고자 중고 책방을 찾아 프랑스어 교재를 구매했다. 시간이 지체되어 다음 약속에 땀을 흘리며 약간 늦게 도착했는데, 오늘 수업 시간에서야 내가 구버전 교재를 샀음을 깨닫고는 꽤나 툴툴거렸다. 매번 2-3유로의 돈을 아끼려다 시간과 돈이 배로 더 드는 경우가 빈번하다. 트램(tram)에서 물었던 두 번의 벌금도 그러하고.


 원래 집으로 일찍 돌아가려 했으나, 교재를 환불받기 위해 생미셀(Saint-Michel)로 향했다. 이내 나는 환불하러 서점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인은 친절히 내가 구매한 금액에 상응하는 가격의 책을 구매할 수 있도록 서명한 쿠폰을 만들어 주었고, 어제 선약 때문에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이 책방의 구석구석을 나는 그제야 살펴보게 되었다.

서점 Abbey Bookshop의 모습, Image from Instagram.com/lastanzabianca

 얼마 전, 오랜만에 한국을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프랑스와 달리 한국에서는 소비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그 느낌이 답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쉬이 공감할 수 없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서점의 수많은 손길이 닿은 책들이,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벼룩시장의 많은 물건들이 두 공간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3번째 방문을 통해 내가 이전에 비해 프랑스나 파리에 대해 엄청나게 냉소적이고 비판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장 좋아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길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잠시 멈춰 주변의 것들에 대해 흥미로워하며 유심히 관찰하는 풍겅이다. 매번 빠른 걸음에, 고개를 박고 휴대폰을 쳐다보는 풍경에 익숙하던 내게 이런 생소함은 항상 감탄을 자아 나게 한다. 무엇보다도 이처럼 ‘다른’ 것들에 대한 끊임없고 지속적인 관심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에 대한 연결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게 아닐까 같은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을 뚫어지라 쳐다보곤 한다.

벼룩시장의 풍경, Image from Instagram.com/shilo.cottage

 환불받으러 서점으로 돌아간 오늘은 내게도 그런 사치와 여유가 허용된 날이었다. 나는 다음 약속이 언제인지, 오늘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교통편은 어떤 걸 이용해야 하는지와 같은 것들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원하는 만큼 쭉 이것저것 집어보고 둘러보고 관찰할 수 있는 하루를 보냈다. 처음에는 환불을 받기 위한 공간이었지만 이내 그곳은 어떤 작가들의 책이 있는지 찾는 공간, 중고 서적에 남은 다른 사람의 흔적을 찾는 공간, 오웰의 책들을 비교해보며 살피는 공간,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좋아라 하는 친구에게 사주는 게 좋을지 가늠해보는 공간이 되었다.

<A Supposedly Fun Thing I'll Never Do Again>, Image from Instagram.com/amilakalaca

 이렇게 집으로 돌아왔다면, 그저 좋은 공간을 방문했구나! 하며 편안히 잠에 들 수 있었을 테다. 그런데 책을 이것저것 고르는 내게 책 추천을 해줄까라고 물으며 다가온 점원 덕에 오늘의 일기를 쓰게 됐다. 그 친구는 나랑 비슷한 또래로 보였는데, 좁은 서점에서 세계 각지에서 오는 사람들에 맞춰 자유로이 언어 모드를 전환하며 일하는 모습이 바빠 보여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No, thank you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자신 있는 태도에 이끌려 어떤 책을 추천할 것인지 되묻게 되었다. 그 친구는 David Foster Wallace의 책을 집어주었다. 이름은 친숙한데, 누구더라-싶었던 나는 간단한 설명을 듣고서야 곧 이 사람이 "Photography as a Tool for Social Change" 수업에서 교수님이 “This Is Water"라는 스피치로 소개해줬던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생동감이 떠올라 나는 오웰을 버리고, 당장 점원이 추천해준 책을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데이터가 안 터지는 서점의 밖으로 나와 스피치 영상을 검색한 뒤 다시 돌아가 그에게 보여주자 그 친구는 이 스피치 참 좋지, 와 같은 대답을 하였다. 서점에서 기대하지 않은 채로 누군가의 책 추천을 맞닥뜨리는 게 실로 너무 오랜만이어서 괜히 기분이 더 좋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1hM5wTRWjZU

David Foster Wallace의 졸업식 연설 "This is Water"의 편집 영상. 우리에게는 무엇에 대해서 생각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서점에는 좁디좁은 통로에서 서로 길을 비켜주며 다른 손님들에게 웃으며 눈빛 교환을 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 속에 서로의 책에 대한 취향이나 이야기도 자유로이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서점에서도 같은 섹션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말을 건넬 수 있을 텐데. 약간의 낭만병스러운 소회지만 오랜만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니 기록해두는 걸로. (2014.12.18. 의 초고를 2016.10.16. 다듬다)



 "This is Water"의 한글 전문은 http://albertlee.io/2013/05/david-foster-wallace-this-is-water-korean/ 에서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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