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창귀(倀鬼)와 자기기만

by 정명

​조선의 설화집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창귀(倀鬼)'라는 기이한 존재가 등장한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죽은 귀신인 창귀는, 억울하게 죽었음에도 저승으로 가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을 잡아먹은 호랑이의 턱 밑에 붙어 굴종하며 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


​창귀가 하는 일은 단순하다.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호랑이에게 바치는 것이다. 더 섬뜩한 점은, 창귀가 불러내는 대상이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 사돈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친근한 목소리로 지인을 숲으로 유인한 뒤, 호랑이의 아가리 앞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야만 자신의 예속이 풀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호랑이보다 이 비열한 창귀를 더 미워하고 경계했다. 맹수는 본능대로 사냥할 뿐이지만, 창귀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공범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서울의 빌딩 숲은 거대한 호랑이가 지배한다.

'자본'과 '생존'이라는 이름의 맹수가 입을 벌리고 있는 이곳에도 수많은 창귀들이 떠돌고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이러한 태도를 '자기 기만(Mauvaise Foi)'이라 정의했다. 자기 기만이란,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부정하고, 자신을 상황에 종속된 '사물'로 격하시키는 행위다.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었어."

"나도 먹고살려면 별수 있나."

"사회가 원래 그런 거야."


​우리가 매일 사무실에서 내뱉고, 술자리에서 듣는 이 말들. 이것이 바로 현대판 창귀의 주문(呪文)이다.

중간 관리자인 김 부장은 부당한 업무를 팀원들에게 떠넘기며 "회사의 방침"이라고 변명한다. 그는 스스로를 가해자가 아닌, 호랑이(시스템)가 무서워 어쩔 수 없이 따르는 피해자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보기에 그는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거절할 자유'와 '저항할 자유'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그에 따르는 불안과 책임을 감당하기 싫어 스스로 시키는 대로 하는 도구가 되기를 선택한 기만자일 뿐이다.

​창귀가 소름 끼치는 진짜 이유는, 그가 한때는 우리와 똑같은 '희생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도 처음에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상처 입은 영혼이었다. 하지만 고통을 겪은 뒤, 그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대신 시스템의 가장 충실한 하수인이 되기를 택했다. 신입 사원이 들어오면 그는 선배라는 가면을 쓰고 다가가 속삭인다. "좋은 게 좋은 거야", "튀지 마라"라고 조언하며, 그들의 날카로운 이성을 마비시켜 호랑이의 먹이로 바친다. 그렇게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는 안도한다. 나만 비겁한 게 아니라는, 나만 당한 게 아니라는 비열한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선다.

부조리한 호랑이 앞에서, 고독하더라도 존엄한 인간으로 실존할 것인가, 아니면 호랑이 뒤에 숨은 창귀로 남을 것인가. ​사무실에서 무심코 내뱉는 "어쩔 수 없다"는 말. 그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진다. 내 안의 창귀가 이미 나를 잠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호랑이는 배가 부르면 사냥을 멈추지만,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기 위해 타인을 끌어들이는 창귀의 식욕은 끝이 없다.


​지옥은 호랑이의 뱃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공범이 되기를 자처하는 우리의 비겁한 변명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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