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와 한병철의 '피로사회'
1. 죽음을 잊은 시체들
좀비(Zombie)는 살아있는 시체다.
그들의 가장 무서운 특징은 한계가 없다는 점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숨이 차면 멈추고, 다리가 아프면 주저앉는다. 고통이 몸을 보호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비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다리가 부러져도 기어가고, 총을 맞아도 달려든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아니 이미 죽어 있으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을 움직이는 건 이성이 아니다. 오직 '먹어야 한다'는 맹목적인 허기, 그리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무조건 달려가는 집단적 본능뿐이다. 쉼 없이 움직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영혼이 없다.
2. 한병철과 자기 착취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 사회를 '성과 사회(Achievement Society)'라고 정의했다.
과거의 사회가 "하면 안 돼(No)"라고 금지하는 규율 사회였다면, 지금은 "할 수 있다(Yes)"라고 부추기는 긍정의 사회다.
이 긍정이 우리를 좀비로 만든다.
"넌 할 수 있어", "노력하면 성공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태돼."
이 달콤한 속삭임 때문에 현대인은 주인이 없는데도 노예처럼 일한다. 자신이 자신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타인이 시켜서 하는 착취는 반항이라도 할 수 있지만, 내가 나를 착취하는 것(Self-exploitation)에는 출구가 없다.
우리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어, 완전히 타버릴 때(Burnout)까지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3. '갓생'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
대한민국은 거대한 좀비들의 병동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미라클 모닝'을 인증하고, 출근해서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하고, 퇴근 후에는 헬스장에서 근육을 찢고, 밤에는 영어 학원이나 주식 강의를 듣는다. 사람들은 이것을 '갓생(God生)'이라 부르며 찬양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 이것이 건강한 삶인가, 아니면 고통을 잊은 좀비의 질주인가?
지하철을 보라. 한 손에는 에너지 드링크(포션)를 들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스마트폰 속의 정보(자극)를 쫓는 사람들. 피로가 극한에 달해 기절할 것 같으면서도, 숏폼 영상을 넘기는 엄지손가락을 멈추지 못한다.
우리는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멍하니 있으면 "시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이 엄습한다. 그래서 쉴 때조차 넷플릭스를 '배속'으로 보고, 여행 가서도 '인증샷'을 찍는 노동을 한다.
우리는 죽도록 달린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남들이 달리니까, 멈추면 물어 뜯길까 봐 그냥 같이 달릴 뿐이다.
4. 멈춤의 용기
좀비 영화의 결말은 항상 전멸이다. 끝없이 달리던 좀비들은 결국 썩어 문드러지거나 불타 없어진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의 끝은 탈선밖에 없다.
한병철은 말했다. "피로한 자여, 멈추라."
진정한 휴식은 에너지를 충전해서 다시 일하기 위함이 아니다. 노동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쉼이 아니라, '무위(아무것도 하지 않음)'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인간이다.
지금 당신의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아직 좀비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그 비명을 무시하고 "할 수 있다"며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붓지 마라.
지금 당장 멈춰 서라. 그리고 대열에서 이탈하라.
남들이 다 뛰어가는데 혼자 가만히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는 사람.
그 사람만이 이 좀비들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