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르상티망'과 하향 평준화의 늪
물에 빠져 죽은 귀신, 물귀신에게는 지독한 습성이 하나 있다. 자신이 갇힌 차가운 물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가를 지나가는 산 사람을 낚아채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대수대명(代數代命)'이라 한다. 남에게 내 불행을 떠넘겨야만 내가 구원받는다는 끔찍한 법칙이다.
그래서 물귀신 괴담의 하이라이트는 항상 '발목'이다.
내가 수면 위로 올라가 숨을 쉬려고 발버둥 칠 때, 아래에서 꽉 움켜쥐는 그 악력.
"나도 죽었는데, 너만 살아서 나가려고?"
그 손길에는 살고 싶은 욕망보다, 너도 나와 똑같이 차가운 진흙탕에 처박히길 바라는 저주가 더 짙게 배어 있다.
니체는 약자가 강자(혹은 자유로운 자)에게 품는 뒤틀린 원한 감정을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불렀다. 자신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바꿀 힘이 없는 자들은, 대신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을 악(惡)으로 규정하며 심리적 보상을 얻으려 한다.
"나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쟤는 왜 편해?"
이 질투심은 곧 "너도 나만큼 불행해져야 공평하다"는 폭력적인 평등주의로 변질된다.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가장 비겁하고 병든 노예의 도덕이다. 자신의 비참함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대신, 남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 안심하려는 하향 평준화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오후 6시, 퇴근 시간. 사무실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부장은 할 일이 없는데도 집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가방을 싸는 나를 향해 툭 던진다.
"김 대리, 벌써 가나? 요즘 일이 없나 봐?"
이것은 업무 지시가 아니다. 물귀신의 손길이다.
자신은 집에 가봤자 반겨줄 사람도 없고 취미도 없는 '회사라는 우물'에 갇힌 존재다. 그런데 감히 네가 나를 두고 저 밖의 세상(저녁이 있는 삶)으로 나가려 해? 그 꼴은 못 본다.
"우리 땐 주말도 반납했어."
"다 같이 고생하는데 너만 빠지면 되겠어?"
이 말들은 '조직력'이나 '책임감'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벗겨보면 썩은 내가 진동하는 르상티망이다.
그들은 내가 일을 못해서 화를 내는 게 아니다. 내가 '자신들이 잃어버린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배가 아픈 것이다. 그래서 야근이라는 족쇄를 채워, 나를 자신의 옆자리(물속)에 앉혀놔야 직성이 풀린다. 다 같이 불행해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발목이 잡히는 순간이 온다. 동기가 승진을 방해하거나, 선배가 내 성과를 깎아내리거나, 팀장이 무의미한 회식으로 내 시간을 뺏으려 할 때.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나를 잡는 건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내가 그들보다 숨을 잘 쉬고 있고, 내가 그들보다 더 밝은 곳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귀신은 죽은 시체는 잡지 않는다. 살아서 펄떡이는 사람만 잡는다.
그러니 발목을 잡혔을 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같이 가라앉아주지 마라.
니체는 말했다. "자신의 길을 가는 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 차가운 손을 힘껏 걷어차라.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수면 위로 헤엄쳐라.
당신이 살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의무는, 그 우울한 우물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