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기운이 몰려오기 전에
지난달 27일 롯데그룹의 스타트업 지원기관인 ‘롯데엑셀러레이터’의 개소식이 열렸습니다. 롯데엑셀러레이터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50억, 롯데쇼핑, 롯데닷컴 등 롯데그룹 계열사 5개 회사가 100억 원을 우선 출자하여 만든 스타트업 투자사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내년에는 150억 원을 증자하여 총 300억 원 규모의 자본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롯데엑셀러레이터는 스타트업 투자를 통해 신동빈 회장이 강조한 ‘롯데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사업’을 적극 찾아나설 전망입니다.
롯데엑셀러레이터와 같이 스타트업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대기업의 행보는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 24일 ‘스타트업 컬쳐혁신 선포식’을 개최하면서 “기존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탈피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소위 스타트업스러운 문화를 내재화하겠다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의견이 반영된 것입니다. 삼성전자는 이어 지난 10일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세계 스타트업 컨퍼런스인 ‘2016 스타트 텔 아비브’에 참가할 한국 대표 기업 선발 과정을 소개하면서 국내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을 돕겠다고 밝혔습니다.
CJ대한통운 역시 스타트업 육성에 적극적입니다. CJ대한통운 종합물류연구원은 지난 3월 11일 사단법인 스타트업포럼과 스타트업 기업 발굴, 육성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고 밝혔습니다. 물류기업과 연계 가능한 스타트업의 신기술, 서비스를 발굴하여 관련 협업 활동을 우선 수행한다는 것이 CJ대한통운의 설명입니다. 이에 대한 연장으로 CJ대한통운은 지난달 25일 경기도 군포복합물류단지내 일부 공간에 중소기업, 스타트업을 입주시켜 물류경쟁력 지원에 나설 예정이라 밝혔습니다.
스타트업은 대기업과의 제휴를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물류와 같이 B2B영업이 필요한 스타트업 같은 경우 대기업 핵심 관계자와의 만남을 통해 기존 거래선을 대폭 확장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다만 실제 스타트업과 대기업 간의 협업이 가시화되기 위해서는 짧으면 몇 개월, 길면 몇 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BGF리테일과 서비스를 제휴하고 있는 물류스타트업 메쉬코리아 유정범 대표는 “CU와 제휴사업을 만들어낼 때까지 기획 기간만 2년 6개월이 소모됐다”며 “메쉬코리아 입장에서는 돈도 마르고 사람도 떠나가는 굉장히 험난한 과정”이라 평했습니다.
더욱이 문제는 대기업이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거나, 제휴 중간에 대기업의 갑질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스타트업들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대기업의 협업 제안에 대해 환영하면서도 내심 비판적인 관점을 내려놓지 않는 이유입니다.
실례로 지난해 모 물류대기업과 소송을 준비했던 한 스타트업 대표는 “해당 기업은 서비스 제휴를 명분으로 몇 차례 미팅을 한 이후, 우리의 제품과 매우 유사한 제품을 업데이트하여 출시했다”고 말했습니다. 외국계 대기업과 제휴하고 있던 또 다른 스타트업 대표는 “서비스 사용자가 늘어나자 최초 협의와는 달라진 무리한 요구가 들어와 결국 제휴 서비스 중단을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대기업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습니다. 스타트업과의 협업은 대기업 입장에서도 실제 ‘이익’을 볼 수 있을 때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대기업이 자선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스타트업 투자, 협업에 대한 실질적 성과가 보이지 않을 경우 당연히 협업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입니다.
대표적으로 CJ대한통운은 지난 2월 지난해 11월부터 운영해온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중단했습니다. 최종결선에 올라온 4개 팀의 사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CJ대한통운 종합물류연구원 한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스타트업의 투자가치가 높다면 망설임 없이 큰 금액을 투자할 수 있지만,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전혀 투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며 “이번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은 아쉬움은 남지만 매년 비슷한 작업을 하면서 가치있는 모델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의도하지 않았던 스타트업 아이디어 도용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기업의 스타트업 아이디어 도용은 대기업 CEO가 아닌 중간 담당자의 개인적인 성과 욕심에 기인한다는 의견입니다. 최근 미팅한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성과인 냥 올리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스타트업 출신 한 대기업 임원은 “실제 대기업들이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경우는 굉장히 많지만, 이는 대부분 현장 담당자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며 “기업 CEO 차원에서 보자면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을 조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득보다 해가 더 많은 결정이 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이렇게 스타트업과의 제휴를 통해 새로운 가치나 이득을 창출하고자 하는 대기업들이 보도자료를 통해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자본과 인프라를 갖춘 거대한 기업이 성장 단계에 있는 약소기업을 도와주는 모양새, 즉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가령 앞서 CJ대한통운이 군포복합물류단지내의 일부 공간에 중소기업, 스타트업 등을 입주시켜 물류경쟁력 지원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CJ대한통운이 얻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들의 말마따나 단순히 약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통해 ‘CJ그룹의 나눔철학을 실천하고 지역사회 발전과 중소기업 상생이라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이미지’를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비단 CJ대한통운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스타트업 지원을 외치고 있는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스타트업 지원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얻는지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기자 입장에서 취재하고,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잘 대답해줍니다. 보도자료에서 강조했던 사항과는 다소 다른 방향의 대답이 나오기도 하지요. 그러나 스타트업 입장에서 기자처럼 대기업 담당자에게 질문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서로 얻고자 하는 것이 감춰진 상생의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 혹여 대기업이 스타트업 지원을 명목으로 아이디어를 갈취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남을 수 있겠습니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스타트업이 대체 왜 우리를 찾아왔을까’하는 짜증스러움이 밀려올 수 있겠습니다.
결국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 협업은 CSR이 돼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명백한 니즈가 맞물리고 그것을 두 기업이 무엇보다 잘 알고 있어야 장기적인 관점의 협업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업계에 만연한 의혹의 판을 깰 때가 아닐까요. 창조경제 활성화 같은 우주의 기운이 모일 것 같은 이야기가 아닌 서로의 니즈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필요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