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레카나로 본 죽음
1. 한국인의 평균수명, 어디까지 늘어날까?
한국 사회는 이제 83.5세라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기대수명을 자랑합니다. 남성은 약 80.6세, 여성은 약 86.4세까지 사는 것으로 집계되었고, 현재 60세 시점이라면 남성은 평균 23.4년, 여성은 28.2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는 OECD 평균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일본·스위스와 함께 ‘가장 오래 사는 나라’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 수치의 반짝임 이면에는 중요한 그림자가 있습니다. 바로 건강수명입니다. 건강수명은 질병이나 장애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기간을 말하는데, 한국인의 건강수명은 73.1세에 불과합니다.
즉, 기대수명과 건강수명 사이에는 약 10.4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임상 현장에서 보면 이 수치가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저는 종종 ‘75세라는 마의 벽’ 이야기를 합니다. 대체로 75세를 넘어서면 생각보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통 그 이전에 크게 아프거나 다치거나, 때로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경계선은 단순한 나이가 아니라, 의료 현장에서 몸소 체감하는 인생의 분기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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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퇴직 이후의 20~30년: 지루한 삶과 병치레
퇴직은 더 이상 삶의 마침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의 제2막이 아주 길게 펼쳐집니다. 이제는 퇴직 후에도 20~3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그 긴 시간 중 상당 부분은 병원과 함께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통계가 보여주듯이, 대부분의 사람은 마지막 10여 년간은 질병과 병치레 속에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웰빙의 질문 못지않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웰다잉의 질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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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웰빙은 익숙해졌지만, 웰다잉은 낯설다
운동, 식습관, 라이프스타일, 여행 등… 웰빙을 위한 수많은 실천은 이미 생활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하지만 웰다잉에 대해서는 여전히 준비가 부족합니다.
기껏해야 상조회사에 가입하는 정도가 아닐까요. 그러나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장례 절차를 미리 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고, 자기 결정권을 지키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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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방식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 선택을 넘어 사회적, 윤리적 논의로 이어집니다.
• 적극적 안락사(active euthanasia)
: 의사가 약물 등을 투여하여 직접적으로 환자의 죽음을 유발하는 방식입니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캐나다 일부,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법적으로 허용됩니다. 그러나 생명 존중의 원칙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여전히 논쟁적입니다.
• 소극적 안락사(passive euthanasia)
: 연명치료를 중단하여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직접적으로 죽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윤리적·사회적 수용성이 상대적으로 큽니다. 한국에서도 2009년 대법원 판결 이후로 사실상 소극적 안락사가 제도적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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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의 연명의료결정법: 존엄사를 위한 절차
2009년 김할머니 사건(폐암검사 중 의식을 잃고 식물인간상태가 된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가족들이 부탁하였으나 병원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소송에 이르게 된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사회적 공감대로 2016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됨.
2018년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시행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한 제도입니다. 구체적인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전연명의료의향서: 19세 이상 누구나 작성 가능. 등록기관에서 상담 후 작성하며, 국립연명의료정보처리시스템에 등록됩니다.
2. 연명의료계획서: 말기환자나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의사에 따라 담당의사와 전문의 1인의 판단 아래 작성합니다.
3. 연명의료 유보/중단 : 환자가 직접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경우, 가족 2인 이상의 일치 진술, 또는 가족 전원의 합의로 의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법은 이렇게 절차를 마련했지만, 현실은 회색지대입니다. 담당 의사의 가치관, 가족 간의 갈등, 환자의 모호한 생전 표현이 부딪히며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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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살레카나: 죽음을 준비하는 의식
인도에는 ‘살레카나(Sallekhana)’라는 전통 의식이 있습니다. 자이나교에서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이 의식은,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가 점차 음식과 음료를 줄여가며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단순히 단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집착을 비우며 자기 존재를 정리하는 영적 실천으로 여겨집니다.
현대인의 눈에는 무겁고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식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준비할 수 있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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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우리의 죽음도 준비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죽음을 두려워하며 외면합니다. 준비하지 않아야 덜 무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준비하지 않을수록 죽음은 더 낯설고 혼란스러운 순간이 됩니다.
살레카나처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죽음을 앞둔 자기 자신과 주변을 정리하는 태도, 즉 ‘삶의 마지막 챕터를 내 의지로 써 내려가는 과정’은 우리 모두가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법적 문서를 작성하는 일일 수도 있고(사전연명의료의향서, 유언장, 재산 분배 계획), 정서적인 정리일 수도 있으며(하지 못한 말 전하기, 인간관계 마무리하기), 철학적 준비일 수도 있습니다(삶의 의미 되새기기,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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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웰다잉을 위한 실천적 준비: 구체적인 팁들
죽음을 준비한다는 말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구체적 실천은 누구나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법
: 가까운 보건소나 지정 상담기관을 방문해야 하며, 단순 서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상담을 받고 충분히 이해한 뒤 작성해야 합니다.
: 국립연명의료정보처리시스템에 등록되어야 법적 효력이 생기며, 언제든 수정·철회가 가능합니다.
: 실제 작성 시 본인의 가치관(“나는 무의미한 연명보다는 편안함을 원한다”)을 문장으로 남기는 것이 좋습니다.
• 유언장 작성 팁
- 자필증서 유언 : 직접 손글씨로 작성해야 하며, 작성 일자, 이름, 서명, 도장이 필수입니다. (워드로 작성하면 무효)
- 공증유언 : 변호사·공증인을 통해 작성하면 법적 안정성이 높습니다. 자산 규모가 크거나 분쟁 소지가 있다면 이 방식을 추천합니다.
- 유언장에는 단순히 재산 분배뿐 아니라,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나 당부를 함께 적어두는 것도 정서적 의미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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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무리하며: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시각에서 보자면,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결국 삶을 완성하는 과정입니다.
• 불안과 회피를 줄이고, 삶의 통제감을 회복합니다.
• 가족과의 갈등을 예방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부담을 덜어줍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 삶 전체를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만들어 줍니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진실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살레카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다르지 않습니다. 죽음은 피해야 할 적이 아니라, 준비할 수 있는 과정이라는 것.
웰빙 시대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웰다잉의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