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다큐 3일 안동역 에피소드로 본 낭만

by 김수철


최근 다큐 3일에서 방영된 안동역 에피소드가 큰 화제가 되었다.

2015년 8월 15일, 내일로 기차 여행을 하던 여학생들과 PD가 맺은 약속.

“10년 뒤, 2025년 8월 15일에 다시 안동역에서 만나자.”


SNS를 통해 그 약속이 퍼지자, 수십만 명이 글을 읽고 공유하며

하나의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나 역시 그 영상을 보며 이상하게도 눈물이 흘렀다.


왜일까.

그 장면이 단순히 영화 같은 설정 이어서일까?

아니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미 희미해진 무언가를

갑작스레 다시 발견했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낭만”이라는 감각일 것이다.



낭만의 본질


정신의학적 시선에서 보자면,

낭만은 인간이 ‘쓸모없음’을 허용할 수 있는 드문 순간이다.

현대인은 늘 효율, 성과, 즉각적인 보상 속에서 산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한 ‘기계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매우 감정적인 동물’이다.


사실 낭만이라는 단어의 뿌리는

18~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은 차갑고 합리적인 세계를 열었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소모품이 되는 불안을 느꼈다.

이에 반발해 괴테는 격정적인 내면을 문학에 담았고,

베토벤과 쇼팽은 규칙을 넘어선 감정의 폭발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들라크루아와 프리드리히는 거대한 자연 속 고독한 인간을 그려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sublime)”를

쾌와 불쾌가 교차하는 격동의 감정이라 했다.

낭만은 바로 이 숭고와 닮아 있다.

불확실성과 불안을 끌어안으면서도,

그 속에서 살아 있음의 매혹을 발견하는 것.



시대별 낭만의 얼굴


낭만은 늘 동일하지 않았다. 시대의 공기와 함께 변주되었다.


• 1980년대: 집단과 저항의 낭만

: 민주화 운동, 민중가요, 대학가 동아리.

: 억압 속에서도 함께 세상을 바꾸려 했던 연대와 이상주의.


• 1990년대: 기다림과 아날로그의 낭만

: 손 편지, 공중전화, 만남의 설렘.

: 영화 <접속>, <동감> 속에서 보이는 느림과 기다림이 만들어낸 집단적 감성.


• 2000년대: 소비와 디지털의 낭만

: 싸이월드 배경음악, 아이팟, 스타벅스.

: 자신을 연출하고, 소비재를 통해 감성을 표현하던 시대.


• 2010년대: 공유와 라이프스타일의 낭만

: 인스타그램, 소확행, 욜로(YOLO).

: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낭만으로 연출한 라이프스타일의 시대.


• 2020년대: 비효율을 선택하는 낭만

: 뉴트로, 아날로그, 요노(YONO).

: 효율과 성과가 지배하는 시대에서 오히려 어렵고 불확실한 길을 택하는 용기.


예) 게임에서 ‘낭만 플레이’(일부러 어렵게 게임을 플레이)를 고집하는 사람들

10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폐역에서 다시 모이는 사람들.

잘 나가는 증권사를 퇴사하고 자신이 좋아하던 빵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

=> “나는 저러지 못하지만,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대리 체험이 주는 울림.



낭만과 정신의학 — 왜 우리는 낭만에 울컥할까?


낭만은 쓸쓸함과 불안을 동반한다.

그래서 언제나 깨지기 쉽고, 사라지기 쉽다.

그러나 바로 그 불안정성이 있기에,

낭만은 더욱 소중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안동역 사건이 우리에게 울림을 준 것은

사람 사이의 끈이 점점 약해지는 시대에

“끝내 지켜지는 약속”이라는 낭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SNS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만,

마음은 점점 더 고립되는 시대에

낭만은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마지막 실마리로 다가온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쓸모없는 감정 때문에 힘들다”, “비효율적이라 버려야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쓸모없음이야말로 인간정신을 지탱하는 힘이다.



남는 질문


낭만은 늘 현재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80년대에는 억압을 거부했고,

90년대에는 느림의 시간을 지켜냈으며,

오늘날에는 효율과 성과를 거스른다.


안동역 에피소드를 통해 아직은 사람들에겐 낭만이라는 감정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떠한 낭만이 다가올까?

이제는 정말로 낭만이란 것은 사라지지 않을까?


2035년 8월 15일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