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학원 선생님의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1.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한 아이
: 문제없다. 원하는 방향으로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흐른다.
2. 공부만 안 하고 딴짓은 부지런한 아이
: 약간의 규율과 루틴만 잡아주면 다시 공부로 돌아올 수 있는 아이들.
3. 무기력한 아이
: 가장 큰 문제.
이 영상을 보며 나는 진료실에서 자주 마주하는 현실과 정확히 겹쳐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진짜 문제는
‘공부를 안 하는 아이’가 아니라 아예 움직이지 않는 아이들이다.
과거에는 비행청소년, 일진, 양아치가 고민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방 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휴대폰만 붙들고 있는 무기력 세대가
더 큰 사회적, 정신의학적 문제로 자리 잡았다.
나는 이 무기력의 뿌리를 아이의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에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책임감이 형성되지 않은 성장 과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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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흔히 말하는 “공부 열심히 해야지”는 사실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부라는 활동에는 인간이 성인으로 자라기 위해 꼭 필요한 세 가지 요소가 담겨 있다.
1) 호기심 (Exploration)
무언가를 궁금해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시도하고, 실수하고, 다시 해보는 과정.
호기심은 무기력의 정반대에 있는 에너지다.
2) 인내심 (Persistence)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반복과 견딤의 힘.
극복의 경험을 스스로 가져본 적 없는 아이는
조금만 어려워도 주저앉기 쉽다.
3) 해상도 (Resolution)
삶을 넓고 깊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지식의 스펙트럼.
해상도가 낮은 아이는 세상을 단순 자극으로 편협하게 보게 되고,
결국 거친 세상에서 자기 삶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
이 세 가지가 약하면
호기심이 줄고 인내가 사라지고 삶의 해상도가 낮아지며
결국 “에너지 붕괴(energy collapse)“가 일어난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무기력의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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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군대 부적응으로 정신과 병원에 입원하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많다.
군대에 적응하지 못해 병원에 오는 청년들을 보면,
나는 책임감의 부재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실감하게 된다.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의무를 저버리고도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며,
어려움이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학생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결국 부모에게 기대며 살아가게 되고,
사회 진입 자체가 어려워지는 경우도 많다.
무기력은 ‘게으름’이 아니라
책임감을 경험하지 못한 삶의 누적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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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아빠가 되니 요즘 가장 많이 드는 고민이 있다.
“어떤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까?”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자기 삶을 견고하게 이끌어가는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그 답은 거창한 교육 방식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작은 책임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 스스로 자기 장난감을 정리하기
• 정해진 주기에 따라 맡은 작은 집안일을 수행하기
• 개인위생관리의 반복과 결과의 연결을 체험하기
이런 작은 경험들이
“내 행동이 환경을 바꾼다”는 감각을 만들고,
이는 곧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의 뿌리가 된다.
”이 걸 하면 원하는 걸 사줄게”, “성적 잘 받아오면 돈 줄게”
이러한 토큰경제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기본 의무를 보상과 교환하는 구조로 만들면
오히려 책임감이 훼손된다.
기본의무는 조건 없이 수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연초 목표를 스스로 세우고 그걸 완수하였을 때 보상을 주는
의무 이상의 성과에 대한 혜택을 줘야 한다.
책임은 기본값, 보상은 선택이라는 기본 전제를 깔고
부모는 첫 약속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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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의 역할이
아이에게 완벽한 코스를 깔아주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여행을 가도,
일상에서 작은 문제가 생겨도,
아이가 먼저 생각해 보고 시도해보게 해야 한다.
문제가 생길 때
“아빠~ 엄마~”라고 부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구조는
아이에게 가장 큰 독이 된다.
부모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다.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해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주는 사람이다.
정신분석에서도
치료자가 해석을 ‘떠먹여 주면’
그 해석은 환자에게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해결해주고 싶은 충동을 견디고,
아이가 스스로 해보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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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이가 무엇을 잘하는 아이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대신 어디서 넘어지든 다시 시도해 보는 아이,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단단한 아이가 되길 바란다.
책임은 아이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가장 작은 엔진이다.
그리고 그 엔진은 부모가 대신 돌려줄 수 없다.
부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순간
아이는 평생 누군가를 찾게 된다.
그러나 부모가 한 발 물러서서
‘스스로 해볼 기회’를 허락한다면
그 경험은 아이 안에 조용한 용기로 남는다.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부모의 사랑은 아이를 대신 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지켜주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