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밀라노 동계 올림픽을 보며 다시 배운 것

by 김수철


몇 년 전, 나는 한 스포츠 장면을 글로 쓴 적이 있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롤러 경기 결승선 앞.

한국의 정철원 선수는 이미 승리를 확신했고, 세리머니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타이완 선수에게 역전당했다.

0.01초 차의 패배


그때 내가 쓴 결론은 단순했다.


“절대. 절대 방심하지 마라.”

“끝까지 집중해야 한다.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그 말은 그때의 나에게는 꽤 설득력 있는 교훈이었다.

세상은 노력과 집중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밀라노 동계올림픽을 보면서,

그 믿음이 얼마나 단순한 세계관이었는지 조금씩 느끼게 됐다.


올림픽은 승리와 환호의 무대라기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였다.



1️⃣ 알파인 스키 활강의 ‘린지 본’ — 완벽히 준비했지만 13초 만에 끝나버린 경기


알파인 스키의 전설, 린지 본(42)


수많은 메달과 기록,

그리고 누구보다 많은 부상과 재활을 겪은 선수.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된 무릎을 다시 세우고,

티타늄 인공관절 수술까지 받고 다시 출전한 활강 경기.


하지만 출발 후 13초 만에 대형 낙상.

닥터헬기에 실려가며, 경기는 그대로 끝났다.


그 장면을 보며 떠오른 생각은 이상하게도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허무감


그녀는 방심하지 않았다.

준비가 부족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결과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우리는 종종 노력과 결과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세상이 이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포츠는 때때로 냉정하게 말한다.


”노력은 의미 있지만,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


그 사실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통제감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닫게 된다.



2️⃣ 스피드 스케이팅의 ‘유프 베네마르스’ — 내 잘못이 아닌데 무너지는 순간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에서

네덜란드의 유력한 메달 후보였던 유프 베네마르스는 올림픽 기록까지 기대되는 페이스였다.


하지만 경기 중반, 중국 선수 롄쯔원의 비상식적인 주행으로 인한 충돌이 발생했다.


상대 선수는 실격됐고,

베네마르스는 혼자 다시 경기를 뛰어야 했다.


결과는 5위.


이 사건은 스포츠가 얼마나 불공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실수하지 않아도,

내 인생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마치 교통사고처럼.


스포츠 심리학에서 이런 상황은 단순한 실패보다 더 어려운 과제로 다뤄진다.


실패는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우연은 수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선수들이 결국 배워야 하는 것은 기술보다도 이런 태도다.


”모든 환경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 받아들임은 체념과 다르다.


세계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다음 행동은 내가 선택하는 것.



3️⃣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최가온’ — 실패 이후에도 몸을 던지는 이유


여성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세계적인 스타 클로이 김,

그리고 그녀를 보며 자란 한국의 어린 선수 최가온.


결승 무대.


첫 시도 큰 낙상.

두 번째도 넘어짐.


보통 이쯤이면 심리적으로 무너진다.


하지만 세 번째 시도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치며 금메달을 가져간다.


사람들은 이런 장면을 보고 흔히 “멘탈이 강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실패를 끌고도 다음 행동을 직접 선택했다. “


성공이 보장돼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다음 시도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기 직후, 클로이 김이 가장 먼저 다가가 축하해 주는 장면.

그 순간은 승패를 넘어선 어떤 감정을 보여준다.


우상은 결국 경쟁자가 되고,

어린 도전자는 다시 다음 세대를 만들어낸다.


스포츠는 그렇게 이어진다.



마지막 — 올림픽이 보여준 인간의 조건


예전의 나는

끝까지 집중하면 결과는 따라온다고 믿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이번 올림픽이 보여준 것은 다른 진실이었다.


완벽히 준비해도 실패할 수 있고,

아무 잘못이 없어도 무너질 수 있으며,

반대로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예상치 못한 성공이 찾아오기도 한다.


세상은 단순한 인과로 움직이지 않는다.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이런 세계를 부조리(L’Absurd)하다고 불렀다.

거대하고 차가우며, 우리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는 침묵의 세계.


하지만 우리는 결과를 보장받아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결과가 불확실하고, 실패가 예정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다시 출발선에 선다.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계속 움직이는 존재.


올림픽에서 내가 본 것은 승리의 장면이 아니라

그 부조리 속에서도 몸을 던지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마,


우리가 스포츠를 보며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도

결국 그것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