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절 특집 - 하루는 길고, 1년은 짧다

ㅡ 부모님들의 시간이 압축되고 있다.

by 김수철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릴 적 하루는 참 길었다.


친구들과 학교에서 놀고, 싸우고, 화해하고,

엄마 몰래 PC방에 갔다가 들켜서 혼나고

하루 안에 수십 개의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출근해서 일하고,

식사하고,

퇴근해서 잠깐 쉬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다.


하루하루는 분명히 바쁘고 피곤했는데

돌아보면

“뭐 한 것도 없는데 1년이 지나버렸네.”


벌써 2026년 2월이 끝나간다.


시간이 빨라진 걸까?



시간이 빨라진 게 아니라, 기억이 압축된 것이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시간을 “흐르는 속도”로 느끼지 않는다.

”저장된 기억의 밀도“로 느낀다.


새로운 경험은

뇌의 기억 중추인 해마를 강하게 활성화시키고

도파민 시스템을 자극해

기억을 촘촘히 저장하게 만든다.


어릴 때 하루가 길었던 이유는

그날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처음 가본 친척 집,

처음 해본 놀이,

처음 겪는 갈등.


뇌는 그 모든 것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반대로

반복되는 루틴 속 하루는

예측 가능한 정보로 가득하다.


뇌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에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기억은 얇게 저장된다.


그래서 어른이 된 우리의 하루는

분명히 똑같이 지나갔지만

회상 속에서는 압축되어 있다.



노년의 시간은 왜 더 모순적으로 느껴질까


진료실에서 노인 환자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하루가 너무 길어요.”

“할 게 없어요.”

“또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답답해요.”


그런데 4주 뒤 다시 진료실에서 만나면

이렇게 말한다.


“벌써 한 달이 지났어요?”

“시간이 왜 이렇게 빨라요?”


이건 모순이 아니다.


우울 상태에서는

현재의 시간은 늘어진다.

흥미가 줄고, 동기가 떨어지고,

정신운동 속도가 느려지면

하루는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돌아보면

새로운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몇 주, 몇 달은

흔적 없이 지나간다.


“하루는 너무나 길고, 인생은 막을 수 없이 빠르다.”


노인우울증에서 보이는 시간 왜곡은

이 두 감각의 엇갈림과 맞닿아 있다.



루틴은 안전하지만, 삶을 길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노년의 하루는 대개 안정적이다.


늘 가는 병원,

늘 보던 사람들,

늘 걷는 산책길.


급성 혼란 상태,

예를 들어 큰 수술 후 섬망이 발생했을 때는

이 익숙함이 치료가 된다.

루틴은 뇌를 다시 붙잡아준다.


그러나 평상시의 삶에서는 다르다.


예측 가능한 하루는

뇌를 크게 놀라게 하지 않는다.


동기는 사라진다.

기억은 얇아진다.

시간은 압축된다.


이건 병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의 문제다.



우리는 치매를 막으려는 게 아니다


치매 발병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이미 축적된 인지예비력이다.


교육력, 젊었을 때의 직업생활,

평생의 지적 활동이 쌓여 만들어진 자본.


지금 당장 취미 하나 더 만든다고

치매를 막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솔직하지 않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건

질병의 예방이 아니다.


부모님의 기분과 삶의 질이다.



부모님의 시간을 다시 길게 만들자


노인우울증 치료에서 중요한 개입 중 하나는

행동 활성화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 가보지 않던 길을 한 번 걷는 것

•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것

• 스마트폰 기능을 배우는 것

• 평생 해보지 않던 취미를 시작하는 것

• 평상시 하지 않을 일을 해보는 것


이건 뇌의 부피를 늘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하루에 작은 사건 하나를 만드는 일이다.


사건이 늘어나면

하루는 덜 지루해지고,

몇 달은 덜 압축된다.


삶은 조금 더 온전하게 느껴진다.



명절에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


건강은 어떠세요? 대신

이 질문을 해보면 어떨까.


“요즘 새로 해본 게 있으세요?”


치매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부모님의 하루가 너무 길게 지루하지 않도록,

몇 달이 너무 빨리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는 병을 예방하려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시간을

조금 덜 압축되게 하려는 것이다.


명절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확인하는 날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

새로운 사건을 하나 더 넣어주는 날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