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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신 Scott Park Jul 27. 2020

나에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무엇을 바꿔놓을 것인가?

엊그저께 우연히 예전 앨범을 들추게 되었다. 그러다 발견한 그리운 얼굴 하나. 고등학교 친구 수만이었다. 1993년 대전에서 열렸던 세계박람회인 대전 엑스포에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수만이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친해졌다. 그 애는 특이하게도 같은 고등학교의 수학 선생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선생님으로, 아들은 학생으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한 학년에 12개 반이 있고, 한 반에 약 60명의 학생이 있는 큰 학교였다. 수학 선생님이 여러 분이었기에, 다행히 우리가 수만이 아버지로부터 수업을 받는 일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로 다른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대학 방학기간 동안 집으로 내려왔을 때 만나서 닭갈비에 소주 한 잔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학교 4학년 때의 마지막 여름방학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직장생활에 치어 서로 시간 내기가 힘들 것이 뻔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추억을 남기기 위해 지리산 천왕봉까지 종주를 하고 나서 대전 엑스포에 들르기로 했다. 


수만이를 포함한 20대 중반의 청년 5명은 아침 일찍 성삼재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자신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패기 있게 출발했다. 오전 동안 순조로운 산행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후에 들어서 최대 풍속 초당 45m의 태풍 로빈의 위력을 실감했다. 지금은 태풍의 이름이 순 우리말로 지어지지만, 그때 당시에는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에서 태풍 이름을 붙였다. 얼굴과 머리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자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모자 위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에 아픔이 전해졌다. 빗방울에 맞아 아프기는 처음이었다. 뱀사골 계곡의 위부분까지 겨우 가서 텐트를 쳤다. 억수로 내리치는 비 때문에 텐트 아래로 빗물이 흘렀다. 텐트 안에도 비 때문에 축축했다. 밤새도록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가운데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다음 날 아침에도 여전히 비는 계속 내렸다. 천왕봉 가는 것을 포기하고 뱀사골 계곡 아래로 내려왔다. 예상치 않은 폭우에 꽤 많은 등산객들이 고립되었고, 그들이 헬리콥터로 구조되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이렇게 첫 지리산 종주 계획은 태풍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


지리산 실패로 인한 아쉬움을 안고 찾아간 곳이 대전 엑스포였다. 신 에너지 개발 기술, 환경보전 기술을 선보임과 아울러 전시관 안내, 교통 숙박 정보, 입장 관리 등을 모두 전산화해서 관리했기에 대전 엑스포는 정보엑스포라고도 불렸다. 우리는 신기한 것들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졸업을 하자마자 바로 취직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 수만이가 자동차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삐삐도 없었으니 누군가 사무실 전화로 연락을 했을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었는데 수만이가 몰던 승용차가 대형 트럭과 충돌해서 트럭 밑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3일 후에 화장터에서 시뻘건 불 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관 앞에 서 있었다. 수만이 아버지께 뭐라 말을 했는데 뭐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로 문득문득 수만이가 생각났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가, 기차 창 밖을 바라보다가, 밥을 먹다가.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를 떠올리는 횟수도 적어져 갔고 그 기억도 희미해져 갔다. 그래도 그를 떠올릴 때면 가슴 한 켠이 시리어온다.  


나에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그 녀석의 운전면허증을 뺏고 싶다. 그가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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