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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팔청춘 Mar 01. 2022

신엘리트 만들기

책, <특권>


특권
(셰이머스 라만 캄/ 후마니타스/ 초판 1쇄/ 2019.11.11)

- 신엘리트 만들기 -


역사를 보면 과거 사람들의 삶이 고정적인 걸 확인할 수 있다. 그 삶의 모습은 신분으로 나타났고, 그 신분은 고정적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올리갈 수 없는 것이다. 먼 훗 날에는 변하겠지 생각해도 변하지 않았다. 10년 뒤 삶을 보고자 한다면, 나보다 10년 먼저 태어난 같은 신분의 사람을 보면 됐다. 중세시대 왕과 귀족, 천민이 나눠졌고,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왕과 귀족, 상인, 천민, 노비로 나뉘어 있었다. 대개 이들의 신분은 태어남과 동시에 정해졌다. 왕의 자식은 왕이 되는 게 당연했고, 귀족의 자식은 무엇을 해도 귀족이었고, 노비의 자식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비였다. 해리포터처럼 주인이 옷을 선물한다고 하여,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이런 신분과 계급은 역할도 나눴다. 왕은 통치를 하고, 귀족은 왕의 통치에 주요한 요직을 맡는다. 상인은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농민은 밭을 일구고, 노비는 소속된 집의 궂은 일들을 도맡아 한다. 구분된 건 역할만이 아니다. 먹는 음식도, 마시는 차도, 바라보는 풍경도, 듣는 음악, 배움도 달랐다. 나뉜 신분과 역할에서 사회 지도층에 속한 사람을 '엘리트(elite)'라고 불렀다. 이들은 꾸준히 상위권에 남았고, 상인과 노비들을 통치했다. 고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달라지지 않았다. 엘리트는 자식의 자녀에게 자신이 누린 특권을 넘겨준다. 하지만, 이는 결국 무너졌다. 혁명이 일어났고, 누구나 평등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특권은 없어져야 하고, 누구나 노력하면 고정적으로 보이는 계급과 신분 상승이 가능해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진 것이다.


책, <특권>은 미국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 세인트폴을 졸업한 저자가, 다시 학교에 선생님으로 들어가 1년 간 학생들의 삶과 학교의 모습을 관찰하며 쓴 책이다. 명문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미국 유수의 대학을 졸업하고, 컬림비아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어느 날 그는 이런 고민을 한다. 세계는 점점 다양성이 강조되고, 심지어는 과거에는 상상도 못 할 이들에게까지 사회 제도와 기관들이 문을 열었는데, 왜 불평등이 계속되는가 하는 점이다.


맞는 말이다. 과거에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했던 이유는 사회 제도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한해서 보더라도, 백인과 흑인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었고, 흑인은 백인에 비해 교육을 받지 못했고, 좋은 교육 기관에 들어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반면 백인은 언제든 들어갈 수 있었다. 백인에겐 활짝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이 흑인에게도 점차 열렸고,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없어졌고, 흑인과 백인은 동일하다는 인식이 당연시 여겨지고 있다. 인간은 평등하며, 노력은 공정하게 평가받는다. 그런데, 왜, 어째서, 평등하게 교육받고 노력하는 데 사회는 여전히 불평등하다. 이해할 수가 없다. 개방의 문은 점점 넓어지는데, 불평등의 왜 점점 날카로워질까.


이 질문을 갖고 그는 세인트폴에 다시 찾아갔고, 거기서 소위 신엘리트라고 하는 이들의 인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세인트폴이 신엘리트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를 알아차린다.


세인트폴이 신엘리트 인식에 심는 건 세상은 다양성과 개방성, 노력의 중요성이다. 세인트폴에는 백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흑인, 라틴, 아시아, 히스패닉, 심지어는 트랜스 젠더와 레즈비언, 게이까지 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인종 말고 개인의 성적 취향이 처음부터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는 학교에서 생활이 거듭될수록 점점 드러난다. 누군가는 스스로 밝히기도 한다. 심지어 학생회장이어도 말이다.


이런 다양한 인종과 성적 취향은 세인트폴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세인트폴에 입학한 학생들은 자신과 다른 색깔과 취향을 가진 동급생들을 보며 내가 있는 곳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인식하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장치가 있다.


세인트폴 내에는 졸업반들만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있다. 졸업반 이외에 그 누구도 여기에 앉을 수 없다. 이는 졸업반의 특권이며, 멋모르고 신입생이 앉았다가는 엄청난 비난과 갈굼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학교 내에 특정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존재하며, 저것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얻게 된다. 졸업반 이외에 학생들이 이 소파를 누릴 수 있는 시기는 오로지 졸업반이 졸업을 앞두고 집에 갔을 때다. 그 순간엔 다른 학생들은 마음껏 이 소파를 누린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다음엔 나다'라고. 단순한 소파 하나가, 학생들에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특권(소파에 앉을 수 있는)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를 누리기 위해 노력해 졸업반이 되면 나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외에도 노골적으로 구분된 예배당의 좌석 배치도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윗 의자에 앉을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런 특권에 함부로 접근하는 걸 막는 건 누구일까? 바로 학생 자신들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고, 그 위치에 맞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안다. 만약, 누군가 이를 거스 로고 행동한다면 엄청난 비난과 비판, 갈굼을 당한다.


학교 또한 학생들의 성취를 더욱 고취시키고자 한다. 가령 500명이 되는 학생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한 번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지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점수에서 올 A를 받았다 등등 별별 이유로 500명의 박수갈채를 받는다. 또한 다양하게 준비된 공식적 비공식적 조직과 그룹을 통해 학생들이 한 번씩은 각 조직을 운영하는 경험을 준다. 이밖에도 유명한 사회적 리더를 초청해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수업에서도 고지식한 것부터 현대적인 것까지 두루 섬렵할 수 있도록 한다. 가령 <베어울프>와 <죠스>를 함께 배우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의 결과 본인들의 학년이 올라가고, 졸업반이 되어 소파를 마음껏 누리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장치와 과정을 통해 세인트폴은 학생들에게 과거의 고정적으로 인식되던 것에서 탈피하게 한다. 구엘리트들이 클래식 음악을 고집하고, 고전 서사를 읽고, 자신의 신분이 공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반해, 신엘리트들은 클래식도 듣지만 랩도 듣고, 고전 서사도 읽지만 현대 소설과 영화도 보며, 신분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인식시킨다. 이 신엘리트들은 다양성을 경험하고, 개방성도 경험하고, 노력도 했다. 이 모든 걸 편안하게 누리게 한다.


불평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말하는 다양하고, 개방된 곳에서 노력을 해봤기 때문에 불평등 한 사람들의 외치는 말들은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되묻는다. "나는 클래식도 듣고, 랩도 듣는데,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너는 랩만 듣는다. 오히려 다양성과 개방성을 잃고 편협한 건 네가 아니냐"라고. 불평등하다고 말한 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신엘리트들은 불평등한 사람들의 무기마저 얻어버린 것이다. 이는 신엘리트가 다시금 사회 지도층이 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고, 오히려 불평등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편협함으로 더욱 견고해진다. 세인트폴은 이렇게 신엘리트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다양성과 개방성이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동안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사회 제도를 개방하고, 공정하게 노력할 수 있도록 했다. 최소한 그렇게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평등을 만드는 건 자식을 낳은 부모의 재력과 그의 사회적 위치다. 내가 서울에서 태어났건, 강원도에서 태어났건은 중요하지 않다. 서울의 평범한 회사원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는 혜택과 강원도 지자체 주요 요직에 위치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분명 다르다.


사회 제도에서 중요한 건 운동장을 먼저 평평하게 다지는 일이다. 사실 이게 가능할까 싶다. 이 책의 내용대로라면 현재 주요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무기로 찔러야 먹힐지 모르겠다.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불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의 무기마저 가져 버렸는데 말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다양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들어 생각하는 건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다양성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색은 그저 겉일 뿐이다. 진짜 다양성은 그 안에 있는 생각, 가치관, 이념, 경험 등이다. 살면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과 읽은 책과 본 영화, 먹은 음식, 사귄 친구들로부터 한 사람이 완성된다. 정치와 경제에 있어서도 이 다양성은 매우 중요하다. 기업의 경제 규모가 커질 수록 이해관계자가 많아지고,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아진다. 정치 역시 사회가 발전할 수록 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모든 것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삶을 통해 만들어진 개개인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고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 역시도 다양성과 개방성이 삶을 윤택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의 내용에서는 오히려 그런 다양성과 개방성이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요소라고 말한다. 이 책의 내용이 흥미로우면서도 무거운 이유다.


밑줄

- 최근 몇 년간 들었던 궁금증 가운데 하나는, 우리네 사회 제도[기관]들이 과거에는 배제했던 이들에게까지 점차 문을 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불평등은 그동안 계속 심해지기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적 불평등의 세상에 살고 있다. 이 말은, 미국이 [평등한] 개방성과 접근성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수용하고, 그 범위를 넓혀 왔지만, 그럼에도 미국 사회의 불평등 수준 또한 높아졌다는 뜻이다. 우리는 보통 개방성과 평등이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난 50년간 우리의 경험으로 미뤄 봤을 때, 그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이 점은 입학생들이 인종적으로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지만 동시에 점점 부유한 학생들로 채워지고 있는 엘리트 대학들에서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난다.(p.21)


- 내 주장은 신엘리트층이 단지 집안의 재력에 의존하거나 신탁 자금을 물려받아 쉽게 사는 특권 의식에 젖은 젊은이 집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엘리트층은 그들의 유산만으로는 사회적 위계질서의 최정상 자리를 보장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삶이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근본적인 면에서 그들은 21세기 평범한 미국인들과 다를 게 없다. 즉, 그들은 세인트폴 같은 곳에 입성하는 데 중요한 것은 노력이며 자신들의 특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p.36~37)


- 나는 세인트폴의 교육이 특권 의식(entitlement) 대신, 점점 더 특권(privilege)을 길러 주는 쪽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했다.(p.37)


- 오히려 엘리트층은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동일시한다. 아침에 일어나 월급 받기 위해 출근한다는 것이다. 경제구조와 경제적 보상 구조의 변화는 부자들에 대한 문화적 이해도 바꿔 놓았다. 이제 단순히 계급 집단주의만으로는 엘리트층이 누구이고 그들이 왜 다른 이들과 다른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p.73)


- 즉,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맞으며, 어쩌면 아들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아버지한테 받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것을 "계급"의 영향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부모의 출발점이 자녀의 도착점을 말해 주는 훌륭한 지표라는 것이다. 인생의 기회들이 부모의 부에 따라 상당 부분 결정된다는 −즉, 자녀들이 이점 아니면 가난을 물려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차고 넘치며, 더 중요하게는, 전후의 낙관주의 시기가 중산층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미국적 진보의 길고 험난한 길의 정점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 또한 상당히 많다.(p.79)


- 세상은 더 개방되었지만 여전히 불평등하다. 계급이 미래 소득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엘리트 기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소외 계층을 환영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왜 이렇게 서로 일치하지 않아 보이는 모습들이 공존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없다. 신엘리트층은 그들 이전의 엘리트들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중략)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이와 반대되는 사례들, 역사적으로 닫혀 있었던 위치들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개방된 사례들이 많다. (중략) 이는 한 세대 전만 해도 이런 기관들의 문턱조차 밟을 수 없던 이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는 뜻이었다. 우리 사회 거의 모든 엘리트 기관이 달라진 것으로 보이며, 이런 변화는 우리의 신엘리트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p.79~80)


- 학생들의 위계에서 상승한다는 것은, 귀족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하는 것이다. 귀족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올라가지" 않는다.−귀족 사회의 핵심은 관계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배당으로 치면, 결코 "좌석을 옮기는 일" 같은 건 없다. 귀족들은 세대가 바뀌어도 [선조들이 앉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는 것이다. 귀족 체제에서는 좌석이 고정되어 있고, 거기 앉는 사람들도 특정 인물들로 고정돼 있다. 신엘리트층의 경우 위계질서의 좌석들은 고정되어 있고 거기에는 질서가 있지만, 학생들은 이런 위치들 안에서 올라가는 법을 배운다. 세인트폴은 세상을 그렇게 급진적으로 재고하는 곳이 아니다. 위계질서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다만 그 안에 존재하는 가능성들이 새로운 것이다.(p.94)


- 그녀의 상승은 노력을 통해 도달한 목표이지 그저 시간이 흘러서 혹은 누군가 물려줘서 응당 받게 된 몫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밀리와 스탠 둘 다 이 새로운 지위를 따내는 데 자신의 역량이 중요했다고 강조한다. 에밀리는 자신이 "할 수 있다"라고 했고, 스탠은, 증거가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목표로 한 것들을 스스로 성취했으며 모두가 다 그러지는 못한다고 했다.(p.98)


- 오히려 자기가 도저히 경험했을 리 없는 것들에 대해 안다고 나서면, 그런 학생들은 "개소리"를 한다며 질타를 받았다. (중략) 특권 의식에 젖은 짓을 할 때마다 바로바로 그런 일들을 당하게 되면서, 신입생들은 자신이 세인트폴의 일원임을 주장할 수 있는 역량은 시간이 지나야 만 생기는 거라는 사실을 배워 나갔다. 이런 부딪힘 들은 특권 의식을 내세우는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자기 가족 덕택에 알게 된 지식은 학생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겪고 살았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본 게 무엇인지였다.(p.103)


- 교직원 대부분은 좀처럼 나나 다른 교사, 학생들 누구와도 어울리려 들지 않았다. 나는 이에 대해 눈치 없이 계속해서 묻고 다녔다. (중략)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 셔츠 왼쪽 상단을 단호하게 가리켰다. 수잔은 명찰을 달고 있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녀는 내 이름을 이미 알고 있고, 또 알 것이라 기대되지만, 내게는 그런 걸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학생들은 교직원들 주위로 형성된 거리감을 통해 배운다. 자신들이 알아야 하고 어울릴 필요가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에게 보이지 않아도 되는 이들은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p.109)


- 직원들에게 더 많이 "관심을 기울이는" 건 사실 중간계급 아이들보다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직원들과 관계를 맺으려 할 가능성이 더 큰 것도 이 아이들이었다. 처음에 이런 관찰 결과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눈 부잣집 학생들이 단순히 남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아무래도 세인트폴에서 더 편안하게 지낼 테니까), 누구와도 대화를 잘 트는 스타일이라 그런 게 아닌가 추측했다. 한동안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나는 부잣집 학생들이 오히려 자신들이 직원들과 맺은 관계의 중요성과 깊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내게 훨씬 더 열심히 입증하려 노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부잣집 학생들은, 그들 "아래"에 있는 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을 의식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같은 능력의 개발은 민주화된 미국 땅에서 유용하고 꼭 필요한 도구다. 엘리트 학생들은 장차 사회에 나가 엘리트가 아닌 이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어울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성공적으로 협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이들이 개발해야 할 중요한 기술이었다.(p.121~122)


- 이런 진술들의 기저에 흐르는 자존감은 학생들의 자기 인식을 형성한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며, 자신들에게 모든 걸 투자한 공동체의 결과물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자의 표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표식은 특권이 틀림없지만, 학생들은 그들이 이 학교에 선발된 것과 들어와서 하는 일들이 모두 자신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는 데 신경을 쓴다. 그 표식은 그들의 성격을 구성하는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을 아예 갖다 바쳐 놨다고 보는 게 적절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택받은 소수들 가운데 위치한 그들의 자리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따낸 것이라고 믿는다.(p.138~139)


- 편안함은 단순히 가족들과 함께한 경험으로부터 상속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인트폴에서의 일상은 그 자체로 교육이며, 그런 경험 없이 주제넘게 아는 척 나선다면 가혹한 반응과 마주하게 된다.(p.159)


- 세인트폴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대부분은 여느 다른 고등학교들에서 일어나는 호르몬 넘치는 과시 행동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런 외관상 드러나는 유사성이야말로 중요하다. 세인트폴 학생들은 그들 자신과 다른 비 사립하교 학생들 사이의, 즉 그들과 나머지 비엘리트 세계 사이의 구분을 사라지게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는 세인트폴과 다른 학교들 간의 차이가 특권과 부라는 명백한 차별점에 있는 게 아니라는 서사를 구축하는 데 일조한다. 그들은 나머지 우리들과 그냥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우리는 접근하지 못하는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도 아니고, 무슨 특권층만 들어갈 수 있는 클럽의 회원권을 돈 주고 사는 것도 아니다. 대신, 특권이 성공적으로 체화되면, 그들과 우리 사이의 간극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그들의 인간 됨됨이"에 따른 거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이게 된다.(p.183)


- 그녀가 레이시에게 세인트폴에서는 "개소리로 헤쳐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중략) 칼라의 성공 비법은 단순히 말을 바꿔하는 요령에 있었다. 그녀가 써낸 페이퍼가 더 나아진 것이 아니라, "그저 달라진 것일 뿐"이다. 그녀를 똑똑하게 만든 건 "선생님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인트폴에서 그녀는 그저 "똑같은 내용"을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내[교사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울 뿐이라는 것이다.(p.193)


- 세인트폴이 학생들에게 각인시키는 첫 번째 가르침은 이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바로 식사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일부터 시작함으로써 학교는 갓 입학한 학생들이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모른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한다. 여기서 목표는 그들을 하찮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일상적 실천을 가르치는 일은 이 학교에서 얻는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부, 직함, 위치, 선행 학습−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자신의 행동과 재능이다.(p.210)


- 그녀는 자기 출신을 알았고, 비록 바꿔 말하는 법을 배우긴 했지만 폴이 이전의 자기 모습을 결코 완전히 저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세인트폴이 실은 특수이면서 마치 보편인("세상이 돌아가는 유일한 방식인"인) 양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비록 그녀가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에 그녀가 참을 수 없어했던 것은 이 학교가 능력주의 가치관을 장려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 하나는 도무지 던져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이 이토록 많이 변했는데, 왜 여기 있는 엘리트 구성원들은 이렇게 조금밖에 변하지 않은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p.211)


- 우리 중 대다수는 이 세상의 근본적인 불평등을 인식하는 데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해 아주 빠삭하게−질려 버릴 정도로 잘−알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리가 흔히 간파하지 못하는 것은, 문화와 사회의 구조가 우리 몸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문화를 자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저 인지적인 자원이 아니라 상호작용적인 자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문화를 상호작용적인(혹은 관계적인) 것으로 생각해 보면, 그것을 나타내는 자연화된 신체적 표식들에 관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표식들은 그저 개별적인 소유물, 즉 해우이자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 표식들이 우리네 관계망 속에서 가치를 가진 것이 되려면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p.278)


- 원래 엘리트들은 하난의 집단으로서 자신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자신들의 일원이 아닌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계급"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분리하고 구별 지어 주는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엘리트들은 훨씬 더 "잡식성"이어서, 사회적 경계나 차별점들을 꽤나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들을 문화적으로 구성해 낸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배제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그들이 가진 힘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데서 생겨난다. 엘리트들을 엘리트로 특징짓는 표식은 단일한 관점이나 단일한 목적이 아니라, 사회계층 전반에서 [나오는 것들을] 고르고, 선택하고, 결합하고, 소비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p.281)


- 이 새로운 청년 엘리드는 클래식 음악도 듣고 랩 음악도 들으며, 고급 레스토랑도 가고 평범한 식당도 간다. 그들은 세상 어디에 있든 편안해한다.(p.281)


- 마치 신엘리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봐! 우리가 무슨 배타적인 클럽 같은 게 아니라니까. 외려 가장 민주화된 집단이 우리라고. 우린 오페라만큼 랩 음악도 편안하게 듣잖아. 고급 레스토랑에 가든 기사 식당에 가든 우린 상관없다고. 우린 다 받아 줄 수 있어!" 이런 태도는 특권이 귀족적 배제가 아닌 민주적 실천을 통해 회득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실천들, 이런 잡식성이 그들을 구별짓 기해 주는 자기들만의 표식이 된다.(p.283)


- 그리고 이런 표식들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특권층은 혜택 받지 못한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너희들이 그런 위치에 있는 건 바로 너 자신의 편협함, 이 개방된 새 세상을 이용하지 않기로 한 너 자신의 선택, 너 자신의 관심 부족 때문이지, 지속적인 불평등 때문이 아니라고."(p.283)


- 몇몇 학생들은 진지하게 연구 계획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의 프로젝트가 세상의 지식에 기여할 거라 생각하고 싶어 했다. 그들의 진지함은 가히 놀라웠다. (중략) [그런데] 세인트폴 학생들은 꽤나 다른 것을 배우고 있었다. 열여섯 살짜리도 불과 몇 주 만에 완성한 페이퍼로 기존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이다.(p.296)


- 여기서 목표는 학생들에게 고급문화적 엘리트 지식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광범위한 문화를 편안하게 이리저리 넘나드는 법을, 엘리트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문화 평등주의자가 되는 법을 배운다.(p.296)


- 자신들의 삶을 학생들에게 헌신하는 선생들을 통해 학생들은 학교에서 매일같이 성화를 경험한다. 이런 특권을 누리는 학생들은 성화하는 상호작용에 의해, 즉 그들 자신이 보여 주는 능력과 장래성에 대해 지속적이고 넉넉한 지원을 제공 받음으로써 그들은 엘리트로 만들어지는 것이다.(p.299)


- 세인트폴에는 거의 100개에 달하는 공식 조직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비공식 조직이 존재한다. 학생이 고작 500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상 거의 모든 학생들이 (특히나 졸업반이 되는 해에는) 이런 그룹 중 하나를 운영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폭넓게 개설돼 있는 교과목들도 학생들에게 서로 다른 분과들에서 뛰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거의 무수한 선택지들을 통해 이 학교는 모든 학생이 어느 한 곳에서는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p.315)


- 이것이 분명히 보여 주는 바는, 학생들의 대학 입학이 단지 그들의 자질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며 엘리트 고등학교들과 대학들 간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 지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학들이 항상 세인트폴이 좋아할 만한 결정만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어떨 대 상담 교사들은 대학들이 잘못된 결정을 하고 있다고 불평하곤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가 흘러 들어가고, 연줄이 이용되면서 엘리트들은 자기들끼리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p.321)


- 인종은 여전히 엘리트층 사이에서 중요하며, 이는 미국 어디서나 마찬가지이다. 접근 기회가 평등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사회적 불평등은 누군가의 삶의 기회에 인종과 젠더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p.355)


- 최상위 학교들에는 25년 전보다 부유한 아이들이 더 많아졌으며, 가난한 아이들은 줄어들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미국에서 계급 언어와 계급 정체성의 결여는 날로 커져 가는 계급 불평등과 맞서는 데 어려움을 초래한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간의 차이는 아주 단순하게 이해해 보면 이런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돈이 더 많다. 그리고 그 돈을 이용해 자신과 아이들에게 이점이 되는 것들을 구매한다. 그들이 그렇게 돈을 쓰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세인트폴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렇게 구매된 이점들이 부리는 트릭은 바로 엘리트들이 누리는 그와 같은 이점을 자연화하는 것이다.(p.355)


- 다양성을 평등과 동일시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우리에게 기술적이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범주로서의 계급이 없기 때문이며, 그 부작용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연대가 거의 부재하기 때문인 탓도 있다.(p.356)


- 계급의식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사회 통합의 아이러니는, 엘리트들이 더 효과적으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강화할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p.356)


- 어쩌면 문화적 위계질서는 배타적 실천들에 의해 단순히 위로부터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유지된다는 것이다. 엘리트들이 문화적 상징들을 넘나드는 것에 일반적으로 무심하다면(혹은 편안함을 드러낸다면), 상류 문화 표지들의 "특별함"은 엘리트들의 배타적 실천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엘리트적 표식을 드러내는 실천에는 참여하지 않는 비엘리트에 의해서도 유지되는 것이다.(p.359)


- 그러니 문화적 배타성이 어디서 오는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 전반을 소비하는 이들로부터 인가 아니면 편향된 소비 성향을 가진 이들로부터 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신엘리트 층이 세상에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들이 열린 사고를 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편협한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p.359)


- 엘리트층이 자의로든 압력에 의해서든 세상에 대해 개방적으로 변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모두에게 개방된 것은 아니다. 접근 기회가 통합과 같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노골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 결과 비엘리트들은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고 비난받는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런 논리의 결과는 끔찍하다. 엘리트와 나머지 우리들이 다른 건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엘리트들이 보기에 자신들은 세계주의(cosmopolitanism)적인 것이고, 참여하지 않기로 선택한 이들은 편협한 것이다. 문제는 개인적 자질과 능력이지 항구적인 불평등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반드시 불이익을 받아서 [불리한 위치에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우리의 새로운, 개방된 사회가 제공해 주는 기회들을 잡지 못한 것일 뿐이다.(p.359~360)


- 제화된 편안함은 이런 개방성의 육체적 표현이며, 이는 차이들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불평등은 그 사람의 출신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만들어 낸 것이 된다.(p.360)


- 세상은 평평하다. 다들 그렇다고들 이야기한다. 이는 망상이며, 엘리트층이 자신들의 지속적인 지배와 상속을 모호하게 하기 위해 그들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는 우화다. 당신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최적의 지표 가운데 하나가 부모의 사회적 위치라는 점은 반복해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p.360)


- 나는 낙관론을 고이 접어 둘 수밖에 없다. 우리의 경제적 추세가 지속된다면, 다수가 만들어 낸 성과가 점점 더 소수의 차지가 된다면, 엘리트들의 이런 변신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즉, 우리는 다양해진 엘리트 계급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엘리트들은 이를 우리 사회가 누구든 공평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개방 사회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들먹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다양성이 유동성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분명 평등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엘리트들은 더 불평등해진 세상에서 더 다양해진 엘리트들이다. 우리의 민주주의적 불평등이 낳은 결과는, 특권이 생산되며 계속해서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상황에서도 이 세상이 공정한 세상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약자들의 무기는 제거되었으며, 불평등을 만들어 낸 책임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약속이 저버린 사람들이 짊어지게 되었다.(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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