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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팔청춘 May 11. 2022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들

책, <사당동 더하기 25>



사당동 더하기 25
(조은/ 도서출판 또하나의 문화/ 초판 4쇄/ 2012.12.12)

-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들 -


최근 필사를 시작했다. 글씨를 잘 쓰고 싶었고, 글도 잘 쓰고 싶었다. 필사만큼 좋은 글쓰기 훈련이 없다고 들었다. 그 말을 믿고 무작정 시작했다. 현재는 언론계를 떠난 권석천 기자의 칼럼을 필사하고 있다. <사당동 더하기 25>는 해당 칼럼을 통해 알게 된 책이다. 그는 칼럼 '성공담이 듣고 싶은 당신께'에서 <사당동 더하기 25>를 이렇게 소개한다.


"실제로 ‘사당동’은 어떤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냉정하고 집요하게 보여줄 뿐이다. ‘가게 주인’이 더 이상 가난한 가장들의 꿈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TV 멜로드라마의 ‘연애 각본’을 흉내 내며 도피처가 될 남성을 좇아 가출하는 엄마들을, 밥벌이나 본드 흡입 때문에 학교를 중퇴하는 소년들을, 중1 때부터 눈 화장하고 밤거리를 방황하는 소녀들을. 도시의 빌딩 숲에 감춰져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의 감각을 날것으로 전한다."


많은 사람이 <사당동 더하기 25>를 읽어봤으면 좋겠다. 사회학자로써 한 가정의 삶을 집요하게 들여다본 조은 교수는 책을 통해 어떤 결론을 내지 않는다. 다만 칼럼의 글처럼 집요하게 관찰하고,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연구자로서 본인이 가진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스스로가 깨달은 바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가 내린 결론이 퍽 와닿지 않고, 익히 어디선가 들었던 것들이라 새롭진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가난과 가난의 문화가 결코 그들이 형성하고 싶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구조적 문제점에서 본인들에게 주어진 것임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조은 교수가 관찰한 금선 할머니 가족은 그 구조적 문제점이 나타낸 결론이었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조은 교수의 연구 목적 혹은 궁금증에 나 역시 호기심이 일었다. 이런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집을 갖게 되면 그들이 과연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집은 상징적이다. 자가, 전세, 월세에 따라 나의 삶 형태와 질이 달라진다. 또 주거에 쓰이는 비용도 다르다. 또한 집을 가지고 있어도 브랜드 아파트냐 혹은 임대아파트냐에 따라 인식이 다르다.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최근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스마트폰에 친구들 이름을 저장할 때 이름과 함께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도 함께 적는다고 한다. 나는 그런 작은 행위가 쌓여 이들의 인식을 완성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그 내용을 봤을 때 정말 무서운 세상이구나 싶다가도, 우리나라에서 집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생각했다. 하물며 집이 없던 사람이 집을 갖게 되면 그거여 말로 가난을 완전히 벗어났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가난한 사람이 집을 갖게 되면 도대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 가정이 된 금선 할머니 가족은 사당동 철거 부지에서 살다가 운이 좋게 상계동 영구 임대아파트로 옮기게 된다. 비록 임대 아파트일지언정 영구 임대 아파트이고, 어쨌거나 집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이 집이 가난을 구원할 수 있을지 무척 궁금했다. 허지만 내 생각에서 내린 결론은 가난한 사람이 더욱 가난해지는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이들의 삶은 도저히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사당동 철거부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지방에서 살다가 돈을 벌러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배운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쓰는 일을 해야 했다. 문제는 가진 게 몸뿐인데, 그 몸을 다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과는 너무나 다르게 오히려 산아제한을 했던 때라 돈만 있으면 정관수술도 하고, 낙태도 하는데 반해 사당동에 거주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임신을 해도 낙태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애를 낳았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 아이를 돌보거나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다. 그런 아이들은 집안에 방치되거나, 길거리에서 또래들과 어울려 노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배우지 못함이 대물림되고, 그 아이들 역시 커서 몸을 쓰는 위험한 일에 내던져지게 된다.


주민들은 스스로는 빈곤이 지속되는 이유로, 건강이 나쁘거나 장사에 실패해 가난을 벗어날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는 개인적인 이유를 대고는 했다. 그러나 이들이 종사하는 직업 자체가 노동 강도가 센 경우가 많고 생활 상태나 주거 조건이 열악해 질병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먹는 것도 부실해서 영양실조로 얼굴색이 좋지 않은 아이들도 많았다. 할머니 손자 영주 씨는 초등학교 때 씨름반 아이들이 먹을 것을 실컷 먹는 것을 보고 부러워 씨름반에 들게 되었다고 했다. 믿을 데라고는 '맨몸'밖에 없는 이들이 병에 걸리면 빚더미에 빠지게 되는 것이 다반사였다.(p.125)


아이들을 방 안에 둔 채 문을 잠가 두고 일 나가는 경우도 흔했다. 심지어 엄마들이 파출부로 일 나가면서 부엌에 딸린 방문을 잠가 버려 그 안에 있는 책가방을 낼 수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도 있었고, 시장 가면서 밖에서 열쇠를 잠그고 가 버려서 아이들이 엄머가 올 때까지 소리쳐 울어서 옆방 사는 사람이 TV를 볼 수 없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시장에서 돌아온 엄마는 "옆집 새댁이 함께 시장 좀 같이 가자고 해서 잠깐 문 잠그고 갔다 왔는데 애들이 울었다"라고 오히려 화를 내면서 아이들한테 "때리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이런 식으로 이곳에서 아이들은 방치되거나 보호받았다.(p.132)


아동 노동에 대한 착취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한 아주머니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지나가는 말투로 "자기 딸 6학년짜리가 방학 때 친구 따라 방배동 가방 공장에 돈 벌러 갔는데 한 달 내내 일하고 2만 원만 준다고 해서 보름만 하고 나오려 하자 주인이 구둣발로 가슴팍을 차서 파스 바르고 있다"고 했다. 원래는 15만 원 준다고 해서 갔는데 3분의 1도 안 되는 돈을 주었다. 딸 친구는 학교를 안 다니는 아이여서 그곳에 계속 붙잡혀 있다는 말도 했다. 딸이 친구를 데리고 나오려고 하자 나가려면 너나 나가라면서 때려서 자기만 나왔다는 것이다. 조교가 꼬치꼬치 캐묻자 "자세히 모른다"면서 "애들을 시켜 먹고 돈 버는 그런 장소가 꽤 있다"고만했다. "그럼 부모들이 가만둬요?" 하자 "다 우리 같은 집들이니까 그렇지" 하면서 넘겨 버렸다.(p.135)


이들을 구할 시스템 변화 혹은 이들을 위한 복지 서비스, 이들을 위한 민간의 노력도 없는 건 아니다. 실제 이들에게 적절한 서비스를 주기 위해 대규모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는데, 설문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설문 조사를 해야 되는 사람들조차 이들 삶에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않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연구자가 목격한 사당동에 거주하는 아줌마들은 대부분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 비정규직이고 일정하지 않았다. 또 가령 본인들이 일을 한다고 하면 남편들 일에 문제가 생길까 봐 제대로 설문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정보를 토대로 정책도 만들어지고, 서비스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서비스가 진짜 사당동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혀 졌을 리 만무하고, 정말 이들을 위한 서비스가 아니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는 상황, 그마저도 다치면 일을 할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사당동 사람들에게 남은 건 본인의 명의이기 그렇게 명의를 내주고 돈을 받게 된다. 그 명의는 대포폰과 대포통장에 활용되고, 명의를 제공한 사당동 주민들은 범죄자가 되어 도망친다. 돈을 내거나 실형을 살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되는데, 내야 되는 돈이 가난한 형편에 낼 수 없고, 그렇다고 실형을 살 수도 없으니 몇 년 동안 눈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사당동 주민들이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한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당동 이야기는 지금에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비정규직 문제는 계속되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들은 여전히 부유해지는 시스템이 계속되고 있다. 이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이상, 사당동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조은 교수는 권석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빈곤층이 전체 가구의 15%를 넘는다. 계층 간 이동 통로마저 닫히면서 사회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와 정책 입안자가 이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길 바랄 뿐이다.”


시스템의 변화는 어느 한순간 만들어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25년 간 금선 할머니의 삶을 지켜본 조은 교수마저도, 연구를 진행하면서 본인이 전혀 몰랐던 사실들에 직면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즉, 어느 시스템의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정말 오랜 시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고,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 역시도 그 문제점들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기획했던 몇 가지 프로그램이 과연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을까? 정말 내가 특정한 사람들에게 이로웠을까? 혹여 그냥 낙인을 찍는 게 아니었을까? 고민하게 됐다. 결론은 모르는 것이지만, 정말 어려운 문제다.


사당동 사람들이 가진 문제점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계속해서 남아 있다.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이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고 싶다. 또 잘하고 싶다.


밑줄

- 할머니 가족을 만난 지 15년이 되었을 때였다. 가족사진이 있으면 자료로 쓰고 싶어 가족 앨범을 빌렸다. 그런데 가족 앨범에는 사실상 가족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이 없었다. 할머니가 교회 야유회 가서 찍은 사진이나 영주 씨가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며 찍은 사진, 은주 씨가 여고 시절 밴드부 할 때 찍은 사진, 덕주 씨의 유치원 졸업 사진, 아저씨가 군대 있을 때 찍은 사진 등 그들의 한때를 기념하는 사진 외에 사당동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집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없다"고 답했다. 왜 없느냐는 우문에 "카메라가 없어서"라고 간단하게 말했다.(p.38~39)


- 당시 카메라는 재산 목록에 들어가는 것으로 웬만큼 사는 사람들이나 갖는 사치품이었기에 자기 집 앞마당에서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그런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지 사당동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p.39)


- 현장 연구에서 연구자들의 한계는 다양한 지점에서 다양하게 드러났다. 연구자들이 현장에 2년 반을 오갔고 조교들은 현장에 1년에서 1년 반 정도 상주했는데도 아주 간단한 사실조차 모르고 간과했음을 알게 되는 일이 수시로 생겼다. 예를 들면 연구 지역 내의 가옥들은 '시멘트 블록 집'들로 중간 보고서에 소개했는데 막상 철거가 시작된 뒤에 시멘트 블록 집이 아니라 진흙 벽돌로 지은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첫 정착민이었던 금선 할머니 정도가 원래는 진흙으로 지은 집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고 대부분의 주민은 이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하지만 외관상 확실하게 보이는 것조차도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아무리 오래 그 동네에 살아도 많은 현장 연구자들이 피상적일 수 있음을 알게 한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p.56)


- 나는 사당동 철거 재개발 지역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현장에 있기는 했지만 정말 위험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그 현장에 부재했다는 점을 증언하고 있었다. 이는 또한 당시 백골단이 출몰하는 철거 재개발 현장이라는 곳이 얼마나 위험하고 연구자들을 겁먹게 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p.64)


- 이 지역에서 우리의 현장 연구 막판에 재개발 관련하여 제법 큰 설문 조사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연구 책임을 맡은 교수가 현장에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조교들과 조사원들이 설문지를 가지고 조사를 했을 뿐이다. 그 보고서에는 이 지역 여성들의 30%도 일을 안 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이해한 바로는 이 지역에서 여성들은 몸이 아프거나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지 않은 한 모두 다 일을 했다. 그런데도 외부에서 나와 설문 조사할 때 일하느냐고 물으면 일한다고 대답한 경우는 3분의 1도 안 되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 "지난 일 주 동안 일하셨습니까?"라는 통상적인 노동 통계 조사 설문을 할 경우 이 지역 여성들은 워낙 불안정한 일이나 비정규직 일을 하기 때문에 '지난 일주일'은 일을 안 한 경우가 상당수여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낯선 사람한테 자기가 일한다는 말을 해서 괜스레 자기 남편이 돈을 못 벌거나 돈을 벌어다 주는 남편이 없다는 말을 정직하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설문 조사 결과는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고 정책에도 쓰였다.(p.83~84)


- 노동 일을 하는 경우에 여성들이 훨씬 임금도 싸고 '하찮은' 일을 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여성이 하는 일은 생계를 해결하는 주업인 경우도 '부업'으로 불린다. 군대 간 오빠를 대신해 딸이 생계를 해결하거나 남동생 학비를 대는 경우도 많고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여성 가구주가 많은데도 여성은 주 생계 책임자가 아닌 것이다. 심지어는 사당동을 철거할 때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강제 철거반원들이 나타나면 아주머니들이 맨 앞에 나서서 몸싸움을 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 아저씨 몸 다쳐서 일 못 나가면 큰일 나기 때문에 자기가 나왔다"는 얘기를 흔하게 했다. 철거 재개발 과정에서도 젠더는 여러 지점에서 여러 방식으로 작동했다. 밤에 세입자대책위에 모이는 사람들은 대체로 부인들이고 부인들이 부업이나 계 등을 통해 동네 안에 유대가 있어 힘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막상 중요한 결정들은 남자들 손에 있었고 세입자 대책위 남자 간부들이 외부 권력과 손잡고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았다.(p.85)


- 계급 계층별 언어 사용의 차이도 생각보다 컸다. 서울말과 지역 사투리 간의 격차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의 계급성이 그토록 심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연구하면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조교들의 현장 일지에 자주 언급되고는 했다. 특히 생애사 인터뷰를 녹취하거나 녹취를 풀면서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다. 발음이 부정확하고 우물우물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학력 때문인가 했는데 자신 있게 의견을 말하고 살아 본 경험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p.86~87)


- 우리는 연구 상대자가 연구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데 반해 연구 상대자들은 연구자들이 자기들만 아는 언어로 질문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사당동 달동네나 상계동 임대 아파트 주민들과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못 알아듣기' 경험은 늘 계속되었다.(p.88~89)


- 사당동은 만들어진 것 자체가 1960년대 서울 도심의 재개발을 위한 철거 이주로 인한 것이었고 해체 또한 철거 재개발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도시 공간의 재편과 도시 빈곤층의 재생산이 맞물린 현장이었다.(p.107)


- 주민들은 스스로는 빈곤이 지속되는 이유로, 건강이 나쁘거나 장사에 실패해 가난을 벗어날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는 개인적인 이유를 대고는 했다. 그러나 이들이 종사하는 직업 자체가 노동 강도가 센 경우가 많고 생활 상태나 주거 조건이 열악해 질병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먹는 것도 부실해서 영양실조로 얼굴색이 좋지 않은 아이들도 많았다. 할머니 손자 영주 씨는 초등학교 때 씨름반 아이들이 먹을 것을 실컷 먹는 것을 보고 부러워 씨름반에 들게 되었다고 했다. 믿을 데라고는 '맨몸'밖에 없는 이들이 병에 걸리면 빚더미에 빠지게 되는 것이 다반사였다.(p.125)


- 아이들을 방 안에 둔 채 문을 잠가 두고 일 나가는 경우도 흔했다. 심지어 엄마들이 파출부로 일 나가면서 부엌에 딸린 방문을 잠가 버려 그 안에 있는 책가방을 낼 수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도 있었고, 시장 가면서 밖에서 열쇠를 잠그고 가 버려서 아이들이 엄머가 올 때까지 소리쳐 울어서 옆방 사는 사람이 TV를 볼 수 없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시장에서 돌아온 엄마는 "옆집 새댁이 함께 시장 좀 같이 가자고 해서 잠깐 문 잠그고 갔다 왔는데 애들이 울었다"라고 오히려 화를 내면서 아이들한테 "때리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이런 식으로 이곳에서 아이들은 방치되거나 보호받았다.(p.132)


- 아동 노동에 대한 착취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한 아주머니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지나가는 말투로 "자기 딸 6학년짜리가 방학 때 친구 따라 방배동 가방 공장에 돈 벌러 갔는데 한 달 내내 일하고 2만 원만 준다고 해서 보름만 하고 나오려 하자 주인이 구둣발로 가슴팍을 차서 파스 바르고 있다"고 했다. 원래는 15만 원 준다고 해서 갔는데 3분의 1도 안 되는 돈을 주었다. 딸 친구는 학교를 안 다니는 아이여서 그곳에 계속 붙잡혀 있다는 말도 했다. 딸이 친구를 데리고 나오려고 하자 나가려면 너나 나가라면서 때려서 자기만 나왔다는 것이다. 조교가 꼬치꼬치 캐묻자 "자세히 모른다"면서 "애들을 시켜 먹고 돈 버는 그런 장소가 꽤 있다"고만했다. "그럼 부모들이 가만둬요?" 하자 "다 우리 같은 집들이니까 그렇지" 하면서 넘겨 버렸다.(p.135)


- 사당동에서 할머니 가족을 연구하고 있을 때 할머니 가계부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기록을 볼 수 있었다. (중략) 그 가계부 한 귀퉁이에는 아들 수일 아저씨가 여자를 돈 주고 산 날이 빨갛게 표시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가계부를 보여 주었을 때 빨간 표시가 있어 물었는데 서슴없이 "아들이 여자를 산 날"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당신 아들이 돈 주고 여자를 사는 것이 가계 수입과 지출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가계부에 표시를 해 놓은 것이었다. 마누라가 없으니까 여자는 필요하고 돈 주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어투였고 마치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식사비를 써 놓은 것처럼 지극히 사무적인 일처럼 기록되어 있었다.(p.192)


- 할머니 집에서 연변 아주머니를 본 것은 1998년 12월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문화 가정'이나 '결혼 이주 여성' 같은 단어가 언론에 오르내리기 전이었다. 사회학자들보다 훨씬 빨리 이 계층에서 한국 사회의 결혼이라는 제도의 허를 찌르고 있었다.(p.235)


- 대포폰이나 대포차 모두 "주민 등록증만 있으면 즉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돈이 궁한 사람들은 쉽게 대포폰과 대포차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가진 게 몸밖에 없는데 노동력만으로 생계유지가 힘들게 되었을 때 '명의를 빌려 주고 수입을 얻는 일'은 생존의 마지막 그리고 가장 쉬운 수단인 것이다.(p.274)


- 이 연구를 정리하면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설명하는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를 가져오는 구조에 주목하게 되었다. 빈곤 문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이 있을 뿐이며 가난을 설명하는 데 가난 그 자체만큼 설명력을 가진 변수는 없다.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다.(p.304)


- 이들 자매는 뭔가 배우는 것을 3개월 이상 계속해 본 것이 매우 드물었는데 이 태권도장만은 지속적으로 다녔다. 이들 자매는 어디를 다니든 한 두 달 잠깐 다니다가 금방 그만두는 일이 되풀이되어서 처음에는 영현이가 뭔가 한 가지를 지속적으로 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영현이와 영선이가 6개월 이상 태권도를 다는 것은 월 10만 원을 안정적으로 보내 주는 장학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정적으로 월사금을 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지속성의 관건이었던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가계의 수입과 관련되는데 아이들 아빠가 직장을 나가 돈이 좀 생기면 아이들 청에 따라 두어 달 보내 주다가 수입이 적어지면 돈을 못 내서 잘리게 되는 일이 그동안 부지기수로 일어난 것이다.(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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